공포 게임 속 수상한 XX가 파티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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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세라세나 작성일2022-09-06 조회17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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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시놉시스.hwp (9.5K) 1회 다운로드 DATE : 2022-09-06 13: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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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공포 게임 속 수상한 XX가 파티를 신청했다. |
1화
주사위는 때때로 타인의 손안에서 던져지기도 하나, 결코 원하는 방향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
『 캐릭터 생성 중……. 』
덮인 눈꺼풀 위로 수면을 방해하는 한 줄기 빛이 어른거렸다. 비몽사몽 한 틈을 타 분절된 몸 곳곳에 상주하고 있던 뻐근함이 제힘을 과시했다.
“읏…….”
옅은 신음을 시작으로 고통을 느낀 의식은 단숨에 깨어났고, 그 덕에 게슴츠레 열린 눈 사이로 글자 나열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게 뭐지……. 아직 꿈속인가?
어슴푸레한 시야에 잡힌 문구를 멍하니 보고만 있자, 정적으로 떠 있던 단어가 둥그렇게 말리더니 페이드아웃 되어 버렸다.
꿈 맞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평온과 고요함을 가진 어둠 속을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노라니 어딘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
……으음.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엥?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이었다. 그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눈을 재차 뜬 것과 팟! 하고 번쩍인 구절이 또 한 번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몽롱했던 전과 달리 맑게 갠 안구에 꽂히는 메시지는 선명했다. 천천히 상체를 곧추세우며 눈동자를 굴렸다.
『 본 게임에 앞서 혐오스러운 공포적 요소가 다수 포함돼 있으므로 심약자,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 등 시청 및 플레이를 엄격히 금지합니다. 』
“저게, 뭐……, 대체, 뭔, 어디…….”
아기 옹알이와 견줄법한 언어능력이 삽시간에 퇴화했다. 그만큼 또렷한 시야에 덮이는 비현실적인 새빨간 텍스트의 향연이 믿을 수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본 게임에 앞서…… 포함돼 있으므로…… 시청 및 플레이를…….”
눈알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나는 어물어물 몇 번이고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집요하고도 처절하게, 끊임없이 재독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꼬일 대로 꼬인 뇌를 가지고 뜨개질하듯 뒤죽박죽 한 머리가 아팠다. 조였다가 풀었다가 약 올리는 편두통에 머리를 얼싸쥐고 몸을 움츠렸다.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여긴 또 어딘데…….
한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입이 열린 건 우습게도 냉기류를 떨쳐내려 몸서리치는 본능을 따른 뒤였다.
“꿈이 아니야.”
꿈은 아니다.
꿈이나 가위 같은 허상이 아니었다. 속 시원히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충분했다.
첫째, 딜레이 없이 자유자재로 유연한 내 움직임.
둘째, 데시벨과 상관없이 내 귓가를 울리는 작은 파동.
셋째, 축축한 쇳내가 섞인 공기 내음.
넷째,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전환의 부재.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봤다.
마지막,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암만 새카만 밤일지언정 시나브로 걷히는 시야의 정밀한 속도감을 꿈에서 느낄 순 없을 터였다. 오감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개방감이 얼핏 엿보였다.
유추하건대, 사방이 습지로 꽉 막힌 어느 공간 안에 속해있는 것 같았다. 여러 정황상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
현실을 부정할수록 현실이 직시 됐다. 이런 아이러니함 마저 현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라니…….
나는 딱딱하게 굳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고 섰다. 이어 입을 한일자로 앙다문 채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그 후 손을 뻗어 단단함과 물컹함이 공존하는 벽을 이정표 삼아 문으로 보이는 형체를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과연, 손끝에 닿는 거칠한 감촉과 바스스 부스러지는 녹가루. 가로로 또 세로로 촉감을 곤두세워 훑은 결과, 쇠창살을 이용해 문의 뼈대를 이룬 구조란 걸 알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철문이었다.
여긴 뭐랄까. 마치…….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자잘 거리는 작은 알맹이들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한 뼘 뒤로 물러섰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어떤 경로든 학습됐을 미지의 공간.
“지하 감옥…?”
탄식 같은 혼잣말이 흘러나온 그 순간 빛바랜 오렌지색의 조명 빛이 찰랑찰랑 점멸했다. 뒤따라 잔상이 맺힌 동공에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남김없이 들어찼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될 대로 내려쳐 만든 듯한 벽엔 푸른 이끼가 뒤범벅되어 있었고, 거머리와 민달팽이가 점액질에 뒤섞여 얼기설기 빼곡했다.
화룡점정, 변색하여 튀어나온 고리와 벌려있는 쇠사슬의 아구창 또한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쏟아내게 할 역대급 미장센이었다.
여러 고문 기구들이 즐비하고 습기로 번들거리는 바닥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눌어붙은 저것은…….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건대, 피로 점철된 머리카락……. 실상 머리 뭉텅이.
설핏 쌀알 무더기로 보이는 하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엔 모형이라 소망할 유골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다리 많은 벌레가 사사사- 기어 다니는 소리까지, 선 넘은 호러 쇼를 능가해 고어쇼를 선보이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훑고 올라온 사늘한 냉기가 뒤통수를 찍고 여러 갈래길로 퍼져갔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머리는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충격 실황에 잠시 집 나갔던 정신은, 끊이질 않고 들리는 섬찟한 합창에 급히 귀가 조치됐다. 곧바로 부식된 철문에 바싹 붙어 삭을 대로 삭은 문고리를 따가운 것도 모른 채 마구 흔들었다.
“문 열어! 당장 열어! 어떤 새끼가 장난질이야! 문 열라고!”
이성은 끊긴 지 오래였다. 눈에 핏발이 서고 육신에 열기가 돌았다. 당장 벌레에 둘러싸여 배를 채워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가질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아악! 열어! 문 열라고 제발 좀! 여기서만 꺼내달라고!!!”
악에 받친 울분이 멈춘 건 철창에 긁혀 손에 긴 생채기를 냈을 때도, 엄지발톱이 빠질 통증이 났을 때도 아닌 굳게 닫힌 철문 뒤에 생겨난 새 창을 보고 난 이후였다.
『 웨ㄹ커ㅁ~◑ㅿ◐ 위험을 무릅쓰고 대저택에 숨어있는-
비밀을 풀기 위해 온 용감한 __을(를)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 』
눈매를 살짝 접어 깨끗이 보려는 노력에도 엉키는 속눈썹 때문에 눅진할 뿐,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 때문에 번진 글씨가 아롱아롱했다. 나는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훔치고 뚜렷해지는 초점에 집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아으, 너희 진짜 나한테 왜 그러니…….”
절망감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망한 말투와 대조되는 발랄한 알림음이 푸다닥 지나가고 기괴한 모양새의 글자가 자리했다.
『 보보보ㅂr보보본격! 아찔한 하드♥모드에 동의하는 ㅂr? ▼ 』
아니.
게임 창은 할 얘기가 많은 듯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는 내게 보채는 식으로 껌벅껌벅 성급하게 명멸했다.
그에 홀린 사람처럼 검지를 펴 손을 뻗다가 멈칫 주저한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다시 손을 빼내 화면을 눌렀다.
“쫄지 말자.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점심만 아, 아니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잖아.”
허공을 가로지를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아크릴판 면적에 닿는 평평함이 느껴졌다.
『자신 망 만 있다면 대저택의 비밀을 풀고 탈출을 도 모할수 있다:x
그러기 위해선 당부드릴 3가지 가 입니다.▼』
번역이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퍼담은 부자연스러운 활자들이 거북했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져 인내심 없는 손짓으로 화면을 연타했다.
『 [1] 킬킬♥ 목숨을 소중히! ㅋㅋ♥ 세이브는 틈틈이! 』
O / O
누구나 다 아는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게임 화면 덕에 생각보다 냉정은 빨리 찾아왔다. 동태눈으로 대충 읽은 뒤, 어차피 고를 것도 없는 동그라미를 정서불안이 찾아온 양 갈겨댔다.
『 [2] 목숨을 소중히! 목, 숨은 단 하ㅏㄴ! 』
O / X
짧은 문구를 순식간에 흡입하면서 성의 없이 O를 누르려던 손가락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후자에 고정된 시선에 여섯 글자가 점점 부푸는 풍선처럼 크게 박혔다.
“목숨은…… 단 하나……?”
직접 소리 내 읽어보니 눈으로 볼 때보다 더 섬뜩했다. 목숨이 단 하나라니. 무슨 뜻이지? 냉동창고 같은 지하에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격렬한 고민이 이어졌다.
저장을 수시로 하니까 잘못된 선택에도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만약 아니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둥둥 떠 있는 화면은 손쓸 새도 없이 커지기 시작해 서둘러 정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목을 옥죄는 부담에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 질식사할 판이었다.
“잠깐! 내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다급한 마음이 억울함을 대변하며 두 다리를 동동거렸다. 그 짧은 사이 몸을 더 크게 부풀린 선택 창엔 ‘목숨을 소중히!’ 그 밑엔 O 버튼만이 전부였다.
망연자실한 나는 그저 차라리 얄미운 게임 창과 함께 터져 죽자는 심산으로 손 놓고 방관하는데, 기막힌 일은 더 이상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
반듯한 원형(O)에 비해 반의반도 안 될 크기의 내 눈이 맞닿았다. 눈싸움 혹은 기 싸움에 승기를 잡은 건 이변 없이 데이터였다. 당연했다. 나는 다른 선택지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아무 데나 가져다 댔다. 어딜 짚든 저 망할 둥근 원 속일 테니. 무기력한 내 머리 위로 마지막 창이 반짝 띄워졌다.
『 [3] 목숨을 소중히. 당신은 게임 속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네 / 아니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내는 입 밖으로 휘지 않은 눈과 억지로 비죽 솟은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나야말로 이 기기괴괴한 게임이라는 플레이어에 적합한 얼굴이었을 터.
검은색이 짙게 밴 ‘네’ 옆으로 색소가 증발한 ‘아니오’는 흔히 컴맹이라는 사람조차 알 수 있는 그것.
백날 천날 지문이 닳아 없어져 손가락 마디가 문드러질 때까지 찍어대도 꿈쩍 안 할 버튼.
애초에 고를 수 없게 만든 ‘아니오’는 ‘비활성화’가 된 상태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조소를 짓고 스르륵 사라진 메시지는 새로운 문구와 함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입 ㅊㅋㅊㅋ★ 지상 최대의 절망과 고통을 __께 선사합니다! 장』
***
같은 시각, 커다란 벽을 가득 메운 대형 화면으로 여자의 말간 우윳빛 피부가 새파랗게 질려가는 걸 은밀히 지켜보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야트막한 숨과 함께 희고 긴 손끝에서 투명한 주사위가 툭 하고 떨어졌다.
톡. 토독. 도르륵-.
주사위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 우리가 마주할 엔딩은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주사위만이 간직한 결말로 굴러갈 뿐. 다만, 그 길이 험난하여 멈추길 원한다면 전력을 다해, 미래로부터 앞지르시길.
2화
앞뒤 전후 사정을 따지는 대신, 직면한 위기를 위해 마음을 다잡은 지가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런 다짐이 한순간에 묵사발 될 난관에 봉착했다.
사라락.
『 콩닥콩닥 X 대저택 살인 사건의 전말♥ ▼ 』
재능 낭비로 만들어진 3D 모델링의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게임 제목이 피를 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괜찮다…… 나는 지금 미치지 않았다…….”
혼잣말과 달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상당한 공백기가 흐른 뒤였다.
『 ___님! 대저택에서 원인 모를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각 맵마다 위치한 미션 수행을 클리어하여, 어둠 속에 덮으려 했던 거대한 음모를 낱낱이 파헤쳐 주세요! 』
그걸 내가 다 하면 경찰은 손 놓고 노니?
“후우, 미치지 않았다. 나는 강하다…….”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주저앉아 되뇌었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 자신도 속아 넘어갈 주문만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파바방★
“엄마악!!!”
난데없는 폭죽에 엉덩방아를 찧고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외피를 찢고 나온 심장이 그늘진 바닥을 내달렸다. 진정할 줄 모르고 펄떡거리는 가슴께에 손을 얹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아 씨! 진짜 제 명에 못 살겠네…….”
한 박자 늦게 머리 위로 형형색색 종잇조각들이 흩날렸다. 알록달록한 색들이 휘날리는 걸 멀거니 보다가 ‘비명 지르면서 욕도 했었나?’ 멍청한 생각을 하며, 정수리에 내려앉은 종이들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고래고래 성대를 울려 성질을 내고 나니 열의를 좀먹는 기운들이 한층 희석됐단 것이었다.
빰! 빠밤!
『 긴? 여정을 떠날 ___님의 닉네임을 정해주세,엿\⊙v⊙ㅗ 』
“참…….”
‘바라는 것도 많고 가지가지 한다’라는 말은 큰 박동을 갈무리하느라 짧아진 호흡 속에 삼켰다. 울컥 치솟는 얄미움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네모난 창의 멱살을 붙잡아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나저나 닉네임을 정하라고? 이 상황에? 퍽이나 잘도 짓겠다 싶어, 콧방귀를 끼고 눈을 감자마자 수많은 글자 조합을 속으로 구상했다.
0.1초를 다투는 육상선수처럼 재빠른 태세 전환도 모자라, 작명에 대한 과한 몰입으로 저도 모르게 검지로 만든 브이 자를 턱에 갖다 댔다. 이처럼 진로를 정하고 대학을 정하는 것만큼 중요하고도 중대한 안건이 아니던가.
메시지 창 밑으로 뜬 포커 배열을 보며 신중하고도 진중한 고민은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으음……. 간결하고, 간지나고, 신박하면서 남들이 볼 땐 관종 같은…….”
1초 만에 끝난 불평과 처한 현실 따윈 말끔히 잊은 뒤, 작명에 숙명을 짊어진 양 이마를 싸매고 고뇌에 빠졌다.
“쓰읍……. 퇴폐 이황……?”
아니. 선 넘지 말자. 그동안 교과서에 있는 온갖 위인들 화장시켜 놓은 것만으로도 불경죄에 성립될 테니.
“앞으로 뒤태? 아, 너나 해. 하 씨.”
늘 이런 식이었다. 커스터마이징까지 끝내주게 완성해놓고 닉네임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 보내다가 게임도 못 해보고 접속 종료하는 날만 수십 수천 번이었다.
언제나 다른 유저 닉네임을 보고 참신하다, 기발하다를 연발하고는 정작 내건 아무거나 끼적이다가 적당히 타협을 봤었는데.
“큼큼…….”
지금이 걸맞은 타이밍이었다.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고, 괜히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본 후 수줍게 터치했다.
[여신]
위애앵- 애앵!!!!!!!!!!!!! 삐리비비빅!!!!!!!!
“악!!!”
미친 빌어먹을 시스템은 거진 중범죄자 취급해대며 철창 안을 적색경보로 물들였다. 구치소 감금 체험하는 와중, 귓속에 총알을 박아 넣는 쨍한 소음이 덤으로 딸려왔다.
생성 불가 메시지를 급하게 치우고,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한 줌의 양심에 올라타 DEL 키를 난사했다.
“아니! 열심! 여신 말고, 열심! 오타야!! 진짜야!!!”
금세 조용해진 공간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 눈치를 살살 살피는 즈음, 불쑥 텅 빈 닉네임 창에 [추천: LIAR]가 떴다가 금방 지지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 새끼 봐라……?
단전에 있던 승부욕이 들끓는 것 역시 그때였다.
[공주림] [여완님] [어도러블리] [퀸 프린세s] [도도한girl] [큐티 섹시 앙큼 앙]
[이뻐버] [귀여미] [청수니] [비너스]…….
스스로에게 부적절한 단어를 쭉 써 내려가는 동안 경보음은 다시금 처돌은 수준으로 울려댔다. 그러나 전에 겪은 경험으로 성장해, 응원가 버금가는 노동요 세례에 힘입어 더욱더 열과 성을 다해 손을 놀렸다.
차후에는 수가 먹히지 않자 적는 닉네임 족족 모자이크가 걸렸다.
“응~. 소용없어~. 내 눈에는 다 보이~ 져?”
유치한 짓을 하니 언행 수준도 따라갔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만행을 멈출 수 있었던 건, 얼마 뒤 손가락이 뻣뻣해져 움직일 수 없을 때였다.
물론 채택된 닉네임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데.”
연신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직 여정에 이응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녹초가 다 됐으니 역시나 시간 낭비는 손해였다.
“흠……. 그냥 아무거나…….”
뉴비 등장★을 치려다 말고, 그것마저 귀찮아져 손가락 관절을 얄짤없이 꺾은 뒤 한결 수월해진 손놀림으로 대강 뚱땅뚱땅 키를 눌렀다.
『 모험가 』
『 생성 오나료:B 』
“흐응…….”
김이 팍 새 버렸다. 나는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멀뚱멀뚱 게임 창을 바라봤다. 피 튀기는 결투 끝에 얻은 닉네임이란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고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때마침 들려오는 낯선 기척에 눈이 철창 밖으로 휙 돌아갔다. 급히 팔을 풀고 소리의 근원을 의심할 새 도 없이 입구에 바짝 붙어 섰다.
누군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주저하는 발걸음이 창살을 붙잡은 내 손을 풀었다 잡았다 하게끔 내적 갈등을 유발했다.
내가 반기는 게 맞는 건가?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더 최악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데.
어두운 복도에서 살랑이는 빛이 점점 거리를 좁혀올수록 발꿈치를 멈칫 멈칫 뒤로 뺐다. 이내 사람의 형체가 언뜻 보일 때쯤 걸음을 뚝 멈춘 뭔가가 가만히 서서 주시했다.
나를. 빤히.
나만을. 뚫어져라.
“흡.”
긴장감에 목을 감싼 얇은 피부가 오목하게 패었다. 경계 차 저절로 들이켜진 숨이 꽉 막혀 터지질 않았다. 새카만 두려움에 뭉개질 무렵, 사람 같았던 무언가가 시공간을 초월할 속도로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타탓. 타닥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크에에에엑!! 키에에에!”
“무, 뭐, 으아아악!!”
이토록 사이좋은 연체동물 곁에 자처해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대한 이성의 끈을 잡고 벽과 밀착되는 불상사는 없게끔 차단했다.
“저건 또 뭐야……!”
거짓이 아니라, 아무 살이나 덧댄 듯 꿰맨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붉고 거무죽죽한 피부에 비이상적으로 큰 눈이 낮게 위치한, 도저히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무언가가 철창에 매달려 두 팔을 쭉 뻗어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콧구멍 크기가 다른 콧대에 윗입술 없이 삐져나온 이는 외면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정상적인 호흡을 방해하는 악취까지 모든 게 처참하고 참혹했다. 제발 열리길 바랐던 문은 덜컹덜컹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유약하게만 보여 불안감이 증폭됐다.
“칵! 칵! 끼이에에에에엑!”
깡통을 으깨 질질 끄는 음성 역시 성별을 뭐라고 나누기엔 귀만 괴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기이했다. 무서웠다. 분명 무서웠는데, 겁나는 생김새와 별개로 눈길을 잡아끄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뭘까.
처음엔 나를 향한 살의라고만 여겼던 눈빛이 애달픈 신호 같았고,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달싹이는 큰 입가도 신경 쓰였다. 뭣보다 위험을 행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보는 사람 코가 시큰거릴 정도의 물기 어린 커다란 눈만이 자꾸 나를 불렀다.
“내가 도, 도와줄 게 있어요?”
“케에에에에에엑! 크르륵!”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어째서 고통스러운 괴음만 내는 건지 점점 안달이 났고, 괴이하게 꺾여 뼈를 드러낸 손을 붙잡아 주고 싶을 만큼 애간장이 탔다.
그러다 마음이 동해 뒤로 물렸던 몸을 천천히 움직여 손톱이 뽑혀 퍼렇게 짓무른 손가락 하나를 살짝 건드리다가, 이내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마주 댔다.
바싹 말라 푸석한 감촉과 달리 옮겨붙은 온기는 생(生) 그 자체였다.
“무슨 일이에요?”
“키이엑! 끼에에에에-!”
“들려주세요. 저한테는 괜찮아요.”
벙긋벙긋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제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인지 머리를 가로젓고 컥컥거리길 몇 번, 기어코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맞잡은 손위로 툭 떨어졌다.
“그르르…… 크, 나…… 를……. 끄으, 아프, 게…… 켁! 만든…….”
“나를, 아프게 만든.”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낭랑한 음색이 아닌 까닭에 귀를 더 가까이 기울인 찰나였다.
퍼엉!
“저런. 위험해요.”
굉음을 비집고 들어온 다정한 어투의 또 다른 목소리. 돌연 바닥으로 짓눌려 남루한 천 쪼가리만 남은 무(無)의 존재. 내 얼굴에 따뜻하고 비릿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여전히 따스한 손바닥을 응시했다. 뒤이어 턱을 타고 낙하한 핏방울들이 손금을 따라 혼을 연명했다.
“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을 벌해주세요.”
피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도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단지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한 얼굴로 미성의 톤을 올려 되물었다.
“으음? 네?”
“방금 그쪽이 냅다 죽인 사람이 한 말이요.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을 벌해주세요.”
“음, 설마. 진심 아니죠?”
“내 귀엔 똑똑히 들렸어요.”
“아니? 그거 말고. 사람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흔히 게임 내에서 볼 수 있는 법사 룩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나타난 그가 모자챙 때문에 얼굴이 반쯤 덮인 밑으로 입꼬리를 휘우듬 길게 늘렸다.
“여기 사람이 어딨어.”
일렁일렁 달래는 말투로 일축한 그가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턱을 들어 올렸다. 나와 남자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눈 맞춤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됐고, 참지 못할 충동에 휩싸인 나는 굼뜨게 한 손을 들어 올려 상대방의 입을 가렸다. 그는 내가 하는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피로 물든 손바닥을 아주 잠시 내려봤다.
그렇게 번듯한 미소가 지워지자 정신을 잃을 만큼의 오싹한 전율이 나를 강타했다.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손이 벌벌 떨렸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다. 내가 압도당했다는 걸 그도 분명 알고 있을 테니까.
앞서 경험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려움, 공포, 긴장, 절망, 무력감, 불안, 시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그의 새빨간 눈동자 속에 결집해 교교히 빛을 내고 있었다.
헷갈릴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었다.
그것은 살기였다.
3화
“누구야. 당신?”
허세 말곤 답이 없었다. 주눅 들었다는 꼴을 보이기 싫었다. 그런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뒤늦게 들린 그의 비웃음이 비수로 날아와 꽂혔다.
“당신? 그건 너무 친밀한 표현 아닌가?”
남자는 가벼운 농담을 가장한 기선제압을 시전했다.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얼뜬 시비 말이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뭐-, 열띤 반응을 원했겠지만 예상에 빗나가질 않아서.”
그가 기지개를 쭉 펴며 날연히 대꾸하는 모습에 날 선 활시위가 더욱이 팽팽해졌다.
“누구냐고 벌써 세 번 물어요.”
“시야가 좁아졌네. 나한테 겁먹어서 그런가?”
아닌 척 서로의 심리를 겨눈 공방전은 치열했다.
“……뭐?”
“음? 아,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보란 듯 손을 바쁘게 휘젓는 작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망가진 건반을 가지고 황홀한 연주를 하는 척. 표정, 행동, 말투 모든 게 교묘한 눈속임 같았다.
얜 뭐야?
나도 나만의 생각하는 동안 옆으로 비스듬하게 선 그가 힐끔, 나를 곁눈질하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전하네……. 속마음 얼굴로 내비치는 건.”
“저기요. 일부러 그래요?”
“네? 제가 뭘요?”
“안 들리게 하고 싶으면 속으로 떠들던가. 입 모양도 작게 웅얼웅얼……, 오히려 그런 게 더 잘 들어오거든요?”
“……귀도 밝고.”
저게 진짜, 또!
“이봐요.”
“여기요.”
내 말을 끊고 뭉근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거린 그가 검지를 뻗어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곳을 보니 ‘lv 6 조력자’라는 글자가 노란색으로 띄워져 있었다.
“……조력자?”
“정답~! 제가 누구냐면, 바로 조력자예요. 하하.”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그는 잔뜩 신난 얼굴로 손뼉까지 작게 치고 있었다. 해괴할 만치 깊이 없는 행동으로 거듭 신경을 긁고 눈을 사로잡았다.
조력자. 조력자라고……. 헷갈리는 타이틀 덕분에 머릿속이 크게 동요했다. 게임 속 방향을 잡아주는 NPC라는 건지, 아니면 나와 같은…….
“사람이에요?”
“네! 와아-.”
뿌듯하게 웃는 그를 뒤로하고 사념에 빠졌다. 나만 있을 줄 알았던 곳에 낯선 사람이 등장하자 의외로 동지애 같은 것보단 심연 저 아래부터 불신이 앞섰다.
단박에 정체를 이실직고했지만 안심되긴커녕, 방금 살기를 드러낸 눈과 마주해선지 갑작스러운 영역 침범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흐음……,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레벨 6의 조력자를 누가요.”
게다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또, 말하고 보니 6은 정말 하찮은 숫자가 아니던가. RPG 게임으로 치면 같은 맵에서 바쁘게 튜토리얼 진행하며, 서로 스치고 스치는 갓 태어난 뉴비 구간의 레벨이었다. 의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방금 태어난 쪼렙.
“레벨이라 불릴 것도 없는 사람보단 나은데…….”
불필요한 지적은 못 들은 척, 그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꼴을 위아래 훑으며 주의 깊게 관찰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눈깔 색은 뭐냐고, 둥근 척하는 성격은 어떻고. 삼각형을 사포로 긁는다고 동그란 원이 돼?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없, 어? 잠깐, 아까 분명.
“사람이 어디 있냐며.”
“각자 앞에 있겠죠?”
“장난 말고, 아깐 여기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랬잖아요.”
“아아. 사람 보기 힘든 데니까 에둘러 말한 거예요. 아까 그건, 음……. 진짜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막히는 것 없이 술술 언변을 펼쳤다. 말장난이란 느낌을 지워낼 순 없었지만.
“난 손도 안 대고 사람이 죽어나는 거 본 적이 없어요. 꼭, 공기로 폭발을 일으킨 거 같았는데. 그런 걸 사람이 어떻게 해요?”
“아까도 말했는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머리가 안 좋으신가 보다. 하하.”
손톱이 박혀 둥글게 말아 쥔 손안에 피가 통하지 않았다. 호쾌한 웃음소리처럼 유쾌하게 웃는 것도 아니고 빈정거리기 위해 눈만 가늘게 접어 말로만 웃는 시늉을 내고 있었다. 한낱 풋내 나는 도발에 불과하건만 왜 이리 열불 터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말을 꼭 두세 번 하게 만들던데. 님 머가리에 애도의 표시를…….”
두 손을 맞대 허리까지 숙이니 웃음기가 뚝 멎은 그의 얼굴 위에 정적이 고였다. 가면이 한 겹 벗겨진 남자를 마주하자 희열에 찬 심장박동이 빠르게 쉼 없이 뛰었다.
미친. 짜릿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만 더 화내봐!!! 울면 더 좋…….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다음으로 취할 대응을 기대했지만, 언제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냐는 듯 말끔히 씻어낸 그가 싱겁게 웃었다.
“그쪽 말대로 그런 걸 사람이 어떻게 해요. 놀라게 하기 위한 어떤 장치겠지.”
“그러기엔 타이밍이…….”
“게임이니까.”
“…….”
“음?”
어버버 거리는 내 앞에서 ‘내 말이 맞지?’의 뜻을 내포한 ‘응?’하나에 상승세 타던 전투력이 지하 300M로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게임인 걸 망각하고 있던 탓이었다.
어쩌지 싶은 마음에 턱을 긁는데, 이제는 굳어 바스러지는 피 찌꺼기가 손톱 끝에 묻어 나왔다. 저절로 호소력 짙은 어느 눈망울이 공중분해 되는 괴현상이 상기됐다.
“정말로…… 차라리 기껏해야 장치였으면 좋겠다.”
피가 말라붙어가는 볼 한쪽도 쓸어내리면서 불현듯 따가운 눈총이 느껴져 앞을 보자 나를 유심히 살피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는 기색이었다.
“……왜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뭘요?”
“가식적인 이타심.”
“…….”
말 하나하나 어찌나 독기가 가득한지 숨길 생각도 없는 적의에 되레 할 말을 잃고 벙쪄버렸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듯한 그의 시선을 빗겨내, 머리를 쓸어올리는 제스처로 황당함과 더불어 화기를 억눌렀다.
“그렇게 비치다니 유감인데요. 처음 본 사람한테 개소리 들을 만큼 막 살진 않았거든요. 제가.”
“아! 다른 뜻이 아니라, 그런 동정심은 지금 상황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니까.”
쯧, 어련히. 늑대와 양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남자를 흘깃거렸다.
지가 야누스야 뭐야?
아까부터 본심을 내놓고 불쾌한 티를 내면 그것까지 준비한 양 아주 매끄럽게 수습하던데, 무척 거슬리는 대화 방식이었다.
“그러시겠죠. 두 번 가엾게 여기다간 위선자 이름표까지 손수 달아주시겠어요.”
“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나저나 시간이 따라줄지 모르겠어요.”
“하! 예예, 바쁘시겠죠. 곧 퍼질러 앉아서 밤새 담소 나눌 만큼 남는 게 시간이라 바쁘시겠죠.”
귀를 후비며 무성의하게 대답하는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별안간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이 보면 황홀한 광경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나는 발끝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야 그럴 수 있겠지만. 뒤에 뜬 누구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는데요?”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소리소문없이 떠 있는 게임 창이 빛바랜 색을 띠며 발광하고 있었다.
『 Q. 모험가_님ㅋ (KEY)를 찾아 감옥에서 ☞탈출☜ 하세용~♪ [제한 시간 –8 min] 』
“뭐야……? 언제 떴어! 왜 멋대로 음소거 질이야! 8분? 뭐, 뭐부터 열쇠! 열쇠 어딨어!”
난데없는 시간 제약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묘사도 하기 싫은 공간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분서주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런 나를 한가로이 구경하는 남자 때문에 우리 신세를 면치 못한 동물이 된 것만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사실 2분을 허비한 거예요. 처음은 10분이었거든.”
놀라 나자빠질 정도로 고마운 소식에 이가 아득바득 갈렸다. 초연하게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린 두 손가락을 분질러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1분 1초를 다투는 숨 가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바삐 눈을 굴리며 짬을 내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7 min.
나만큼이나 급격하게 줄어드는 숫자에 절규했다. 흔히 시계 소리를 표현하는 째깍째깍 소리도 없으니 묵음에 쫓기는 처지가 배로 공포스러웠다.
-6 min.
골인 지점에 다다른 매정한 시간은 조금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았다. 얼굴을 처박고 바닥을 훑느라 머리에 피가 쏠려 시야가 흔들렸다.
미치겠네! 저장의 여부는 고사하고 뭐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잖아!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은 것도 잠시, 위치가 불분명한 열쇠를 찾느라 고개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벽과 바닥 곳곳에 눈길이 닿았는데, 이쯤 되니 선택이 불가피한 가설 하나가 거듭 등을 떠밀었다.
삐용! 삐용!
-5 min.
“하……. 알았으니까, 제발.”
빼곡히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저것들 배를 전부 까뒤집자는 결단을 내리고, 발을 막 옮기려는 차였다.
“설마 저속을 파헤치려는 건 아니죠? 아, 말만 해도 역하네요.”
“아까도 만졌어요. 시체도 못 건질 곳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낫고요.”
“시체는 내가 건지고,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단 판단은?”
역시 초라한 레벨을 달고 이름값 못하는 조력자. 닉네임 변경이 시급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주욱 끌어올린 채 결의에 찬 말투로 응수했다.
“조금도 없어.”
미간을 살포시 접어 찡그린 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에 잠긴 남자를 무시하고 제법 큰 사이즈의 거머리 등에 손을 갖다 대려는 찰나 뇌리를 스치는 의문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쟤는 어떻게 밖에 있는 거지?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곧게 피고 의문을 담은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가 가볍게 말아 쥔 손을 입에 갖다 대 목을 울렸다.
“흐음? 아쉽네, 좋은 구경 놓쳤네요. 드디어 눈치챘나 봐요.”
그의 입 앞에 있던 손이 펴지자 그토록 염원하던 열쇠가 커다란 손안에서 찰랑 깨끗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줄까요?”
그의 손짓대로 고리에 매달려 짤랑짤랑하는 열쇠에 분열된 자아끼리 대립이 시작됐다. 저 금속 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될 것이냐,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아까 멋진 척은 왜 해선. 자책이 되는 걸 보면 파블로프 쪽이 성향에 맞긴 한데.
“됐어요. 그쪽도 노력해서 얻었을 테니, 나도 해보는 데까진 해볼게요.”
동네 사람들 나대는 제 입 좀 보셔요.
허락 없이 나불대는 입에 주리를 틀고 싶었다. 대상이 대상인지라 본심과 정반대인 헛소리가 자꾸 튀어나왔다. 평소 먹을 때만 쓰던 입은 역시 동여매고 있는 게 현명했다.
아쉬움에 굳은 입매가 뻣뻣해졌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숟가락 들 힘이 없을 때 자존심이 밥 떠먹여 줄 믿음으로 살아가야겠다.
“후회할 텐데.”
흥. 아는 척은.
나는 콧방귀를 뀐 채, 거부당하고 민망함에 내뱉는 객기쯤이라 여기고 남자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띠링!
『 Unlucky 모드 발동! 서둘러염! 공간이↔줄어듭니다앙*οωσ [제한 시간 - 死 min] 』
그걸 왜 이제 알려주니?
4화
제한 시간 옆, 숫자 대신 쓰여있는 그림이 단번에 해석되자 비통했다. 죽을 사라니. 참 친절하기도 하지. 사주에 망신살로 도배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미끄러지는 길만 밟을 순 없는 법.
끼익, 크응! 그그그극.
“허읍!”
생과 사를 두고 터득한 축지법으로 벽과 거리를 벌리고 섰다. 손으로 만진다 했지 온몸으로 부대끼고 싶단 적은 없었다. 저 멀리 차츰 다가오는 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종족과 다리와 털만 있는 풍성한 종족에 21세기 지성인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남자를 향해 애원했다.
“열쇠! 빨리! 빨리빨리! 아악! 온다!”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흠칫한 남자가 한 발 짝 발을 뒤로 뺐다.
“……입에 거품.”
그러지 마. 멀어지지 마. 닦으면 되잖아.
“빨리! 오잖아! 나한테 오잖아!”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날 보던 남자는 침묵을 유지하며 쉬이 열쇠를 넘겨주지 않았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살기로 무장했기에 되도록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과연 인생이란 한 치 앞도 예상 못 하는 거라 했던가.
“그럼 아까 ‘줄까아?’ 하고 물은 건 뭔데!”
“그런 적 없어. 그리고 그냥은 안돼.”
“여기서 협상을 시도하는 건 아니잖아! 이거 안 보여?!”
나야말로 못 배워먹은 패악질에 버금가는 행패였지만 별 수 없었다. 자그마치 괴해충들이 혼비백산하여 내 발을 피해 새카맣게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나도 노력해서 얻은 거라.”
그가 또 한 번 열쇠를 흔들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주름을 와락 일그러트린 나와, 남자의 팔랑팔랑 부드러운 눈웃음이 참으로 상반되고 눈물 나게 고와서 어금니를 짓씹고 물었다.
“그래. 그럼 뭘 원하는데.”
“글쎄? 이를 테면 파티라든가.”
“파티?”
“그래, 파티.”
남자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지그시 눈을 맞췄다.
파티. 게임 내 다른 유저들과 뜻이 같은 무리를 이루고 보상을 취하는 개이득 시스템. 뼛속까지 솔플러인 사람에겐 흠이지만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공동체.
-3 min.
뭐라도 제안하면 일단 전부 수렴하자는 심산이었지만, 막상 동맹을 맺자고 권고하니 여간 떨떠름한 게 아니었다.
챙이 넓어 그늘진 눈 위로 번쩍이는 저 눈. 마치 루비와 황동을 녹여 만든 듯한 진한 잔혹함의 상형. 살해쯤이야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손쉽게 저지르고 본뜬 시체를 박제해 장식품 대용으로 비치할 것 같은 괴랄한 본질이 다량 함유된 저 눈이 문제였다.
“어…… 그, 그러니까…….”
나는 여태 갈피를 못 찾고 입만 뗐다 붙였다 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유심히 보다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얘기했다.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그거 알아요?”
“……뭘요?”
“귀신들이 시계 소리를 참 잘 따라 한대요.”
“시계 소리요?”
“네. 시계 소리.”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하던 그때, 고개를 홱 쳐들고 남자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연했다. 어쩐지 긴박한 상황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똥줄 타게 만들더니. 내 머릿속이 아니라 진짜 들리는 거였구나.
누군지 몰라도 설계 한번 기가 막혔다. 물렁했던 정신에 매다 꽂힌 초침 사운드는 좀처럼 사유할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남자의 하등 쓸모없는 정보로 괜히 넋을 일깨워준 덕분에 속도를 가해 결정할 수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런 건 비밀로 간직해 주고, 파티는…… 좋아요. 네, 해요!”
대충 이번 위기만 넘기고 바로 손절 각잰다. 속 시커먼 놈 같으니라고.
“확실히 하죠. 볼일 다 봤다고 중간에 깨고 유야무야, 그딴 거 없으니까.”
홀리 쉣. 독심술?
얕은수를 손쉽게 간파당하자 식은땀이 쓴웃음을 진 얼굴 위로 폭포수마냥 흘러내렸다. 심지어 얼어붙은 남자의 눈 코 입을 보니, 내 장례식장에서 파티를 열 것만 같아 연신 쿨럭대며 헛기침으로 속내를 무마시켰다.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 같이 다니겠어요? 피차 못 믿는 건 똑같은 거 같은데.”
“못 믿는다는 증거는?”
날 보면서 내비친 살기다. 이 새끼야.
“그럼 열쇠만 잠깐 빌려줘요. 나가면 도로 줄 테니까,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각자 갈 길 가고.”
“양심 없어요?”
응. 조금 그런 편.
크그그긍! 끼릭, 끼이익.
-2 min.
팔을 조금만 더 길게 뻗으면 벽이 닿을 테고, 밀려드는 바닥 모서리에 바글거리는 벌레가 큰 포복 두 걸음이면 나를 삼키고도 충분한 거리가 됐다. 이 이상의 시간 지체는 곧 자멸이었다.
“그럼 뭐 어떡하자고요!”
“내게 귀속되어 영멸할때까지.”
“……?”
느닷없는 느끼한 소리는 둘째치고, 그의 몸 주변에서 빨간 기체가 너울댐에 의아해하던 와중 남자가 덧붙였다.
“그때까지 파티는 지속되는 거예요.”
그 얼굴. 아까 나를 짜릿하게 만들었던 선득한 그 얼굴이었다. 분명 같은데, 나는 왜 숨 한번 내쉬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걸까.
아마 그에 대한 답은, 나와 동일시한 몸 곳곳의 세포들이 전이시킨 짜릿함에는 환호를, 지금의 자극에는 피부를 뚫고 나오려는 위험 신호를 닭살로 준 이유일 것이다.
띠, 띠링!
알림음은 소리를 덧대며 중복된 두 개의 창을 띄웠다.
『 지금부터 60초 카운트를 시작합니다. [제한 시간 -1min] 』
『 [조력자]님과 파티를 수락하시겠습니까? [-59sec] 』
조하 / 실허
문구를 읽어 내려갈 때 역시,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었다. 뺨에 드리워지는 어둡고 질척이는 기운과 발에 채는 가려운 건조함에 30초를 들어선 절체절명의 순간 손가락을 급히 들어 올렸다.
엄지손가락만한 알맹이 두어 개가 기어코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오자 졸도하기 직전 두 다리를 마구 털며 간청했다.
“아아아악! 할게! 제발 살려줘!”
눈이 다 감기기 전, 열린 문 틈새로 난입한 희고 긴 손이 내 허리를 둘러매고 강한 힘으로 끌어냈다.
그그그그, 쿵!
파바바바방!★
『 콩그레chu-♥레이숀 ㅊㅋㅊㅋ합니다! Mission Clear! :> 』
“허억, 허억…….”
찬 바닥에 널브러져 숨 가쁘게 심호흡했다. 거친 숨소리가 입안을 깔깔하게 만들어 괴수 같은 신음이 마른 성대를 긁고 흩어졌다.
“어흐…….”
다리를 쭉 뻗고, 머리를 뒤로 젖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미션 클리어라는 고딕체의 영어가 둥둥 떠 있었지만 단 한 스푼의 기쁨과 반가움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는 게임 창 뒤로 약간 작은 사이즈 때문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창이 공허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 1. lv6 조력자
2. lv1 모험가 』
우여곡절 성사된 파티원의 목록이었다. 두 닉네임 옆으로 길게 그어진 빨간 게이지를 보아하니, 아마 체력바를 나타낸 듯 보였다. 풀로 채워진 조력자 밑에 반절이 꺾인 내 상태바는 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돼 결국 바닥에 머리를 뉘었다.
“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할 일이 많아요. 거기서 살 거예요?”
뾰족한 말투에 비해 천사의 숨결 같은 음성에 홀린 듯, 줄곧 갇혀있던 감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간이 압축됐기에 그 안에 살던 생명체들은 일체 짜부가 되어 혼합된 점성을 뚝 뚝 흘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웬 걸.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슬며시 상체를 일으켰다. 남이 봤다면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뱅뱅 돌릴 정도로 미쳐 날뛰었던 쇠창살 그 너머엔, 모난 곳 없이 반드러진 나무 벽이 곧게 깔려있었다. 안 어울리게 묻혀있는 철문이 아니었다면 입구도 찾지 못했을 터였다.
“벽이…… 됐네?”
“이제 필요 없는 오브젝트잖아요.”
혼잣말치고 컸지만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어서 조금 맹한 얼굴로 남자를 마주했다. 머리 위에 떠 있던 닉네임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그렇네요. 게임이니까…… 여기도 그렇네.”
조력자가 서 있던 동굴 입구마저 나무 장판으로 곧게 깔려있었다. 새로운 탈바꿈이었지만, 남자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는 걸로 주제를 간단히 종결했다.
“아, 살려줘서 고마워요.”
병든 닭처럼 매가리 없이 건넨 인사치레에 조력자가 은근한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뒤늦게 가식적인 이타심이라며 눈 돌아가게 만든 언행이 떠올라 허둥지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심이에요! 조력자님 아니었으면 저 문처럼 나무 인간이 될 뻔했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히히…….”
억지로 웃는 통에 뺨 두 쪽과 눈 밑이 후들후들거렸다.
“같이 다닐 땐 웃지 않도록 해요.”
콱씨. 주둥이 조사벌라.
그의 말 한마디에 중력을 이기지 못한 볼이 밑으로 쑥 꺼졌고, 늘어난 입꼬리가 옹졸하게 모여들었다.
아까 뭐 영원히 같이 다니자고 안 했나? 결국 평생 웃지 말란 소리잖아?
웃는 얼굴은 건드리지 말랬거늘. 저 눈알 찌를 것 같은 모자 벗겨내고 정수리에 손날을 확 박아버릴까 보다. 근데 저 모자 보면 볼수록 과하다 과해. 지가 콘헤드야 뭐야.
도도히 돌아선 얌체 같은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힘차게 들어 올린 찰나였다.
“아, 그리고.”
“흐브!”
너무 놀란 나머지 입술을 붙이고 소리 내 버렸다. 거두지 못한 중지와 볼에 바람이 찼다가 빠지는 걸 번갈아 보던 조력자는 이내 눈매를 찌푸리곤 독백하며 앞서 걸어갔다.
“나무 인간이 아니라, 그 벽에 짓눌려서 뼈도 못 추렸을 거예요. 그쪽 말대로.”
어쩐지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퍼뜩 다리를 움직여 조력자를 쫓았다.
사락.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10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남자를 따르는 내 뒤로 우롱하듯 음소거로 떠오른 메시지 창은 기다란 복도를 선단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공중에서 음흉하게 서 있었다.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5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성큼성큼 전진하는 조력자에게 하릴없이 시선이 뺏겨 경계를 허물고 주위를 살피지 않은 불찰.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1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과실과 유착이 만나 생겨난 죄악. 죄인이 저지른 처음이자 마지막 오류는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온다.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수령 완료.] 』
이미 어둠에 삼켜진 두 사람 뒤로, 길이 나있던 바닥 조각조각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곧이어 눈이 멀 정도의 하얀 빛이 크게 발광하더니, 점차 사그라들며 구절을 품은 네모난 도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 가엾은 모험가_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TIP! 곳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도망은 공멸의 지름길. 상대보다 먼저 칼을 빼드십시오. ▼ 』
『 언제나 모험가_님의 안녕을 위하여. 』
쾅!
5화
“히익!”
별안간 낙뢰처럼 내리꽂히는 커다란 굉음에 소스라치며 뒤돌았다. 목을 비튼 보람도 없게 칠흑마저 덮어버린 어둠만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다.
“어후, 놀래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괜히 남자를 보는데, 역시 고답적인 제자답게 미동도 없었다. 마치 돌상 같은 자태에 멋쩍음이 두 배가 됐다.
“큼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내게 조력자의 눈길이 언뜻 닿았지만 모른 척, 분위기 환기도 시킬 겸 혀끝에서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그 옷들은 뭐예요?”
그러자 본인의 기다란 옷자락을 내려보고 낮게 유지한 시선이 내 쪽에도 스쳤다. 그가 귓불을 바투 만지고는 느른히 대꾸했다.
“여기서 주웠어요.”
그니까 왜 그런걸.
“아, 네. 주워 입으셨구나.”
별생각 없이 그가 한 말을 다시 복기했을 뿐인데,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순간 뜨끔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말뜻을 의뭉스레 표하는 추임새에 메마른 웃음을 어색하게 지어 보였다.
***
“…….”
“…….”
어두침침한 주변 탓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 삐거덕거리는 원목 데크타일을 발맘발맘 내딛는 나와 조력자 사이에 괴괴함이 흘렀다.
제기랄. 수, 숨 막혀.
어딜 가는 건지, 어디까지 온 건지, 얼마큼 더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에 답답하고 불편함에 압사할 것 같았다.
산소 호흡기가 절실할 무렵, 입에 거미줄을 치고 나아가는 조력자를 흘겨봤다. 이분은 아예 승려의 길을 걷기로 한 듯, 침묵 수행을 성실히 정진하기에 엄숙한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복장 터져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
공상이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해 과대망상이 될 지경에 이르자 조력자가 모살을 위한 큰 그림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당장 고독을 씹을 때가 아니라고 사료돼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어- 어, 저는 아직도 좀 얼떨떨한데…… 빨리 적응하셨나 봐요.”
조만간 이동 생활하며 수렵과 채취를 하고, 벽화로 소통하기 전에 성대의 근육을 쥐어짰다. 벌써부터 말 한 토막 하는데, 목이 걸걸한 것 보면 현명한 선택이라 방증했다.
“왜요?”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사실 저는 아직도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데…….”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지금이 현실이란 건 틀림없으니까.”
이어가던 말을 한템포 쉰 조력자가 나를 보곤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겠어요.”
“아, 네. 노력 중이에요.”
“그리고 저보단 낫잖아요. 혼자보다 둘인데, 의지도 되고 심적으로도 훨씬 편할 거고. 그렇죠?”
예상보다 성의 있는 대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꽤 당당한 후자를 듣고 나니 삐딱한 대거리가 내 입꼬리를 추욱 떨궜다.
두 번 편했다간 아예 머리 밀고 산길에 동행하게 생겼는데요. 하여간 콤비가 되기엔 내게 너무 먼 그대였다.
“어, 쏘 굿. 음, 그런데요.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글쎄요.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 같은 돌부처가 또? 절대 사절.
“으, 아니요…….”
“왜요?”
“저는 무교라.”
“…….”
싱거운 교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 빈자리를 대신해 적막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단절된 대화는 정신건강에 무척 해로웠으므로 재차 주제를 던졌다.
“조력자님은 어쩌다 이곳에 왔어요?”
“모르겠어요. 눈 떠보니 게임 속이던데요.”
“어, 저랑 같네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기 전에는 뭐하고 계셨어요?”
“아! 저는, 저는…… 그니까 어…….”
어라?
결코 어려운 질문이 아니건만 당황스러웠다.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자기 전에 뭘 했지? 기억해내려 할수록 뿌연 안갯속을 들여다보는 듯 갑갑할 뿐이었다.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금방 답을 하지 못하자 남자의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던 발걸음도 그 자리에 못 박혀선 오직 답변만을 토색했다.
“눈을…… 감았어요.”
“……네?”
“눈 감았는데요? 아니다. 불을 껐나?”
손바닥에 땀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입을 작게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조력자는 몹시 황당해 보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휘발된 메모리를 그대로 발설할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본능이라 답하겠다.
“그, 그쪽은요? 조력자님은 뭐 하셨어요?”
“아, 네. 뭐…… 저도 비슷하겠죠.”
“흐흥, 하하하하!”
“아, 하하하하.”
미친. 하나도 안 웃겨.
벌레 소굴에서 눈을 떴으니, 너무 놀라 기억을 잠시 잃은 거라고 자위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조력자가 마주 보며 웃는 건 예상 밖에 일이었다.
아깐 웃지 말라며. 이거 완전 바보들의 행진이잖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원했던 건 맞지만, 워낙 서로 켕기는 게 많으니 억지웃음 멜로디가 귀곡성 같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하하. 음, 그래요. 맞다! 열쇠는 어떻게 얻었어요?”
“노력해서요.”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남자를 지나쳐 걸었다. 어쩌면 대화를 지속하지 않는 게 신상에 더 이로울 거란 판단이었다.
***
그 어떤 시시콜콜한 잡담도 없이 벽에 손끝을 스치며 좀 더 걸었을 때였다.
띠링!
『 Q. 대저택을 환하게 밝힐 퓨즈를 찾아 연결하세요. (퓨즈 0/2) 』
아무리 어두워도 시간이 흘러 익숙해진다면 어느 정도 형상은 가늠이 됐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눈에 걸리는 게 없어 제자리걸음을 의심하던 차 퀘스트가 떴다. 못해도 거진 팔천 보는 걸었을 거라 자부했다.
“아, 드디어.”
내가 뱉은 한숨 같은 탄식에 거리를 벌려 걷던 조력자가 다가왔다.
“왜요?”
“퓨즈를 찾으래요. 그쪽도 받았어요?”
“난 이미 했어요.”
양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였던 몸을 일으켜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보자 조력자는 그때처럼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파란색의 LV6이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를 도왔다.
“아……. 그럼 지금 잘 보여요?”
“네.”
“잠깐 기다려봐요.”
나는 조력자와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그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어림조차 못할 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신나게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게 몇 개일까요~!”
“한 개네요. 그것도 손가락 중에 제일 긴.”
군더더기 없는 정답이었다. 나는 팔을 주무르며 방전된 기계처럼 터덜터덜 조력자 앞에 섰다. 어쩐지. 적확한 나침반처럼 거침없이 걸어가더라니.
“보이는 줄 몰랐네요. 물어보질 않아서 언질도 안 주신 거겠죠.”
“네.”
냉정과 열정 사이 딱 가운데에 위치한 감정선이 중립을 지켰다. 따질 것도 없이 화낼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도움을 받아 퀘스트를 깼고 저자는 혼자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레벨 6을 만들었을 테니. 오히려 초라하다고 비하한 내가 더 나쁜 인간이었다.
“네……. 그럼 여기 있을래요? 저는 퓨즈 찾으러 다녀올게요.”
“네.”
저런 X놈의 새끼.
인간 고쳐 쓰는 게 아니란 절대적인 진리. 어디 안 가고는 못 배길 본성에 3초 전 했던 자기 반성이 무용지물 되어 버렸다.
선의로 건넨 빈말을 덥석 물은 조력자는 보란 듯 바닥에 퍼질러 앉아 후련한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그 행태를 보며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냐고, 저 치렁치렁한 옷자락으로 목을 조르고 싶었다.
“음. 저랑 파티는 왜 하신 걸까요?”
“아아. 괜찮아요. 아직 민폐라고 여긴 적은 없어요.”
나는 색다른 해석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코 옆을 긁었다.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건지, 저 양반 이해력이 딸리는 건지 분간이 안 돼서였다.
“아니. 진짜 민폐로 전락하면 손해가 막중하실 텐데 왜 저랑 다녀요, 굳이?”
“그거야 당연히 재-.”
“재?”
“미-.”
연이어 속을 긁는 저 아구창 안에 두 주먹을 쑤셔 넣고 떡방아를 찧는 충동이 일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고등동물로 남을 수 있었다.
“재밌잖아요. 구경거리도 많을 거 같고. 이번엔 안 놓쳐야지.”
확인 사살까지 해주는 자비로움에 온기가 치솟다 못해 팔팔 끓었다.
뭐? 재미?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재미를 찾다니.
뱃속에서부터 영양분 대신 낙천적인 사고를 주입했나. 감히 흉내도 못 낼 여유였다. 혹은 혼신의 깐족이라든가.
“둘 중 하나라도 재밌으니 다행이네요. 그럼 앞도 잘 안 보이는 제가 다녀올 동안 쉬고 계실 거죠?”
“네.”
저런 X놈의 종자 새끼를 봤나.
“으흠, 그 재밌다던 파티원 하나를 잃으셔도?”
“…….”
먹혔다.
말 끝날 때마다 ‘네, 네’ 거리던 네무새는 돌연 말을 아꼈다. 이어 나를 보기 위해 홉뜬 눈동자가 심상치 않은 안광을 내뿜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죽음의 신 하데스도 벌벌 떨 저 눈동자가 심장을 멈추게 하는 원흉이었다.
“짠, 농담이었습니다. 다녀올게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몸을 움직였다. 말장난하다가 세상을 하직하고 싶진 않았다. 쌀쌀한 영안실에 누워 고인이 된 사인이 농담으로 인한 상대의 촉발성 살인이라면, 그 얼마나 가치 없는 죽음이란 말인가.
“이래서.”
몸을 돌리고 선 내 뒤로 조력자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뚝 멎은 다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금세 곁에 다가온 그가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금속 물질을 빼 들었다.
넌지시 귀를 후벼파는 잠깐의 따가운 들림만으로도, 구태여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알아차리는 건 난제가 아니었다.
칼. 보통 식칼의 기준점이 되는 길이에 미치지 않는 걸로 보아, 어둠 속에서조차 반짝이는 그것은.
아무리 짧다 한들, 사람의 급소 따위는 손쉽게 꿰뚫을 단도임이 틀림없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른침이 자꾸만 넘어갔고, 손발이 바들바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기복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지만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선 무력할 뿐이었다.
“무, 뭐예요? 갑자기 칼은 왜……?”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요?”
“그럼요. 당연하잖아요.”
어떻게 잊어. 세기의 메스꺼운 대사였는데.
“뭔데요?”
“귓속, 귀, 귀속되어 영멸할 때까지.”
“귀속은 이미 됐고, 영멸할 때까지. 그전에 결렬되는 건 용납 못해요. 자의든 타의든 죽지 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 부지해서 약속 지켜요.”
낮고 음산한 목소리. 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목소리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알았어요. 그런 얘길 왜 흉기를 들이밀고…….”
그래서 살라는 거야. 당장 죽으라는 거야. 혼미할 정도로 휘두르는 그의 결기에 명맥이 위태로웠다.
“구두계약은 꼭 문제를 만드니까.”
“구두계약 아닌데…… 우리 머리 위에 표시가 딱.”
샥!
“아악! 뭐, 뭐 하는, 지금…….”
난데없는 조력자의 돌발행동에 입을 틀어막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한줄기의 어슴푸레함도 없었다면 이런 살 떨리는 짓을 바로 앞에서 목도하는 일은 없을 텐데, 가늘게 풍기는 피비린내에 아뜩했다.
주륵, 뚝. 뚝. 뚝.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칼날을 손으로 덮은 상태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손잡이를 잡아 빼냈단 말이다.
6화
“진짜 미쳤어요? 뭐 하는 건데!”
화가 났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어깃장을 놓는 거라 생각했다. 서슴없이 자신의 살을 가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삼신할머니가 와도 점지 못할 능력 밖의 수준이었다.
“공증 준비.”
“뭐?”
“서류가 남아야겠다고.”
“너 진짜 또라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니?”
“어. 그래야 풀려. 그러니까 장단 좀 맞춰줘.”
조력자는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폭 넓은 소매 안으로 들어간 혈액이 벌겋게 스며든 옷감을 관통해 팔꿈치에서 뚝뚝 떨어졌다.
“장단? 장난해? 너는 장단을 자해로 맞춰?”
“쯧. 자해는 무슨.”
그는 눈 한쪽을 찡그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여유가 물씬 풍기는 몸태에 짜증이 치솟았다. 상처를 낸 건 조력자였다. 그런데 과다출혈로 죽을까 봐 마음을 졸이는 건 나라는 게 전부 불쾌하고 언짢았다.
“설마 울어?”
“신경 꺼! 원래 빡치면 눈물 나니까!”
“왜?
“하 씨……. 뭐, 왜? 왜?! 진짜 열받게…… 으흐엉…….”
허물어진 물둑에 들이붓는 눈물샘을 손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말 안 하고 손 베서?”
미친놈인가.
“말하고 베는 건 으흡, 정상인 줄 알아?”
“그럼 뭐 때문에 우는데요.”
눈물의 발단은 조력자 탓이 분명했지만, 그렇게 말하자니 한 가지로 함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에 부합한 대답을 못 찾고 함구한 채 그저 울음만 삼켰다.
“왜 우냐니까.”
“하이씨……. 더럽게 집요해서 운다! 됐냐……?!”
“아니잖아요. 무서워서 그래요? 그럼 빨리 퀘스트하고 불을 켜요.”
“으흑……. 그냥 입 여매고 가만히 있으라고…….”
서러웠다.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게임 속이라는 사실이 서러웠고, 작은 소리에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게 서러웠고, 현재가 내일인지 오늘인지 시간을 알 수 없어서 서러웠고.
자기 전 내가 뭘 했는지 기억 나지 않는 게 서러웠고, 고작 몇 시간의 공백만이 아닌, 나에 대한 촘촘한 정보가 부분부분 뿌리째 뽑혀 나가서, 마음을 몇 번이고 고쳐먹는데도 자꾸만 무너져서, 그래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또, 언제 변할지 모를 그가 한층 누그러든 말투로 핀트 나간 엉뚱한 대답하는 게 안심돼서, 무작정 모든 게 서러웠다.
쭈그려 앉아 고개 숙이고 우는 내 머리 위로 긴 한숨이 복잡한 심경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조력자 또한 나와 시선을 맞춰 무릎을 굽혔다.
“어차피 퓨즈는 나한테 더 이상 안 보여요. 퀘스트가 끝났으니까. 그 대신 이걸 줄게요.”
머리만 약간 들어 로브 속을 뒤적거리는 남자를 훔쳐봤다. 겉에 둘러진 망토 때문에 보이지 않는 물건의 정체가 호
주사위는 때때로 타인의 손안에서 던져지기도 하나, 결코 원하는 방향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
『 캐릭터 생성 중……. 』
덮인 눈꺼풀 위로 수면을 방해하는 한 줄기 빛이 어른거렸다. 비몽사몽 한 틈을 타 분절된 몸 곳곳에 상주하고 있던 뻐근함이 제힘을 과시했다.
“읏…….”
옅은 신음을 시작으로 고통을 느낀 의식은 단숨에 깨어났고, 그 덕에 게슴츠레 열린 눈 사이로 글자 나열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게 뭐지……. 아직 꿈속인가?
어슴푸레한 시야에 잡힌 문구를 멍하니 보고만 있자, 정적으로 떠 있던 단어가 둥그렇게 말리더니 페이드아웃 되어 버렸다.
꿈 맞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평온과 고요함을 가진 어둠 속을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노라니 어딘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
……으음.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엥?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이었다. 그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눈을 재차 뜬 것과 팟! 하고 번쩍인 구절이 또 한 번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몽롱했던 전과 달리 맑게 갠 안구에 꽂히는 메시지는 선명했다. 천천히 상체를 곧추세우며 눈동자를 굴렸다.
『 본 게임에 앞서 혐오스러운 공포적 요소가 다수 포함돼 있으므로 심약자,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 등 시청 및 플레이를 엄격히 금지합니다. 』
“저게, 뭐……, 대체, 뭔, 어디…….”
아기 옹알이와 견줄법한 언어능력이 삽시간에 퇴화했다. 그만큼 또렷한 시야에 덮이는 비현실적인 새빨간 텍스트의 향연이 믿을 수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본 게임에 앞서…… 포함돼 있으므로…… 시청 및 플레이를…….”
눈알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나는 어물어물 몇 번이고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집요하고도 처절하게, 끊임없이 재독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꼬일 대로 꼬인 뇌를 가지고 뜨개질하듯 뒤죽박죽 한 머리가 아팠다. 조였다가 풀었다가 약 올리는 편두통에 머리를 얼싸쥐고 몸을 움츠렸다.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여긴 또 어딘데…….
한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입이 열린 건 우습게도 냉기류를 떨쳐내려 몸서리치는 본능을 따른 뒤였다.
“꿈이 아니야.”
꿈은 아니다.
꿈이나 가위 같은 허상이 아니었다. 속 시원히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충분했다.
첫째, 딜레이 없이 자유자재로 유연한 내 움직임.
둘째, 데시벨과 상관없이 내 귓가를 울리는 작은 파동.
셋째, 축축한 쇳내가 섞인 공기 내음.
넷째,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전환의 부재.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봤다.
마지막,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암만 새카만 밤일지언정 시나브로 걷히는 시야의 정밀한 속도감을 꿈에서 느낄 순 없을 터였다. 오감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개방감이 얼핏 엿보였다.
유추하건대, 사방이 습지로 꽉 막힌 어느 공간 안에 속해있는 것 같았다. 여러 정황상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
현실을 부정할수록 현실이 직시 됐다. 이런 아이러니함 마저 현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라니…….
나는 딱딱하게 굳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고 섰다. 이어 입을 한일자로 앙다문 채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그 후 손을 뻗어 단단함과 물컹함이 공존하는 벽을 이정표 삼아 문으로 보이는 형체를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과연, 손끝에 닿는 거칠한 감촉과 바스스 부스러지는 녹가루. 가로로 또 세로로 촉감을 곤두세워 훑은 결과, 쇠창살을 이용해 문의 뼈대를 이룬 구조란 걸 알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철문이었다.
여긴 뭐랄까. 마치…….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자잘 거리는 작은 알맹이들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한 뼘 뒤로 물러섰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어떤 경로든 학습됐을 미지의 공간.
“지하 감옥…?”
탄식 같은 혼잣말이 흘러나온 그 순간 빛바랜 오렌지색의 조명 빛이 찰랑찰랑 점멸했다. 뒤따라 잔상이 맺힌 동공에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남김없이 들어찼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될 대로 내려쳐 만든 듯한 벽엔 푸른 이끼가 뒤범벅되어 있었고, 거머리와 민달팽이가 점액질에 뒤섞여 얼기설기 빼곡했다.
화룡점정, 변색하여 튀어나온 고리와 벌려있는 쇠사슬의 아구창 또한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쏟아내게 할 역대급 미장센이었다.
여러 고문 기구들이 즐비하고 습기로 번들거리는 바닥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눌어붙은 저것은…….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건대, 피로 점철된 머리카락……. 실상 머리 뭉텅이.
설핏 쌀알 무더기로 보이는 하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엔 모형이라 소망할 유골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다리 많은 벌레가 사사사- 기어 다니는 소리까지, 선 넘은 호러 쇼를 능가해 고어쇼를 선보이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훑고 올라온 사늘한 냉기가 뒤통수를 찍고 여러 갈래길로 퍼져갔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머리는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갉작-.
충격 실황에 잠시 집 나갔던 정신은, 끊이질 않고 들리는 섬찟한 합창에 급히 귀가 조치됐다. 곧바로 부식된 철문에 바싹 붙어 삭을 대로 삭은 문고리를 따가운 것도 모른 채 마구 흔들었다.
“문 열어! 당장 열어! 어떤 새끼가 장난질이야! 문 열라고!”
이성은 끊긴 지 오래였다. 눈에 핏발이 서고 육신에 열기가 돌았다. 당장 벌레에 둘러싸여 배를 채워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가질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아악! 열어! 문 열라고 제발 좀! 여기서만 꺼내달라고!!!”
악에 받친 울분이 멈춘 건 철창에 긁혀 손에 긴 생채기를 냈을 때도, 엄지발톱이 빠질 통증이 났을 때도 아닌 굳게 닫힌 철문 뒤에 생겨난 새 창을 보고 난 이후였다.
『 웨ㄹ커ㅁ~◑ㅿ◐ 위험을 무릅쓰고 대저택에 숨어있는-
비밀을 풀기 위해 온 용감한 __을(를)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 』
눈매를 살짝 접어 깨끗이 보려는 노력에도 엉키는 속눈썹 때문에 눅진할 뿐,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 때문에 번진 글씨가 아롱아롱했다. 나는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훔치고 뚜렷해지는 초점에 집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아으, 너희 진짜 나한테 왜 그러니…….”
절망감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망한 말투와 대조되는 발랄한 알림음이 푸다닥 지나가고 기괴한 모양새의 글자가 자리했다.
『 보보보ㅂr보보본격! 아찔한 하드♥모드에 동의하는 ㅂr? ▼ 』
아니.
게임 창은 할 얘기가 많은 듯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는 내게 보채는 식으로 껌벅껌벅 성급하게 명멸했다.
그에 홀린 사람처럼 검지를 펴 손을 뻗다가 멈칫 주저한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다시 손을 빼내 화면을 눌렀다.
“쫄지 말자.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점심만 아, 아니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잖아.”
허공을 가로지를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아크릴판 면적에 닿는 평평함이 느껴졌다.
『자신 망 만 있다면 대저택의 비밀을 풀고 탈출을 도 모할수 있다:x
그러기 위해선 당부드릴 3가지 가 입니다.▼』
번역이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퍼담은 부자연스러운 활자들이 거북했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져 인내심 없는 손짓으로 화면을 연타했다.
『 [1] 킬킬♥ 목숨을 소중히! ㅋㅋ♥ 세이브는 틈틈이! 』
O / O
누구나 다 아는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게임 화면 덕에 생각보다 냉정은 빨리 찾아왔다. 동태눈으로 대충 읽은 뒤, 어차피 고를 것도 없는 동그라미를 정서불안이 찾아온 양 갈겨댔다.
『 [2] 목숨을 소중히! 목, 숨은 단 하ㅏㄴ! 』
O / X
짧은 문구를 순식간에 흡입하면서 성의 없이 O를 누르려던 손가락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후자에 고정된 시선에 여섯 글자가 점점 부푸는 풍선처럼 크게 박혔다.
“목숨은…… 단 하나……?”
직접 소리 내 읽어보니 눈으로 볼 때보다 더 섬뜩했다. 목숨이 단 하나라니. 무슨 뜻이지? 냉동창고 같은 지하에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격렬한 고민이 이어졌다.
저장을 수시로 하니까 잘못된 선택에도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만약 아니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둥둥 떠 있는 화면은 손쓸 새도 없이 커지기 시작해 서둘러 정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목을 옥죄는 부담에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 질식사할 판이었다.
“잠깐! 내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다급한 마음이 억울함을 대변하며 두 다리를 동동거렸다. 그 짧은 사이 몸을 더 크게 부풀린 선택 창엔 ‘목숨을 소중히!’ 그 밑엔 O 버튼만이 전부였다.
망연자실한 나는 그저 차라리 얄미운 게임 창과 함께 터져 죽자는 심산으로 손 놓고 방관하는데, 기막힌 일은 더 이상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
반듯한 원형(O)에 비해 반의반도 안 될 크기의 내 눈이 맞닿았다. 눈싸움 혹은 기 싸움에 승기를 잡은 건 이변 없이 데이터였다. 당연했다. 나는 다른 선택지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아무 데나 가져다 댔다. 어딜 짚든 저 망할 둥근 원 속일 테니. 무기력한 내 머리 위로 마지막 창이 반짝 띄워졌다.
『 [3] 목숨을 소중히. 당신은 게임 속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네 / 아니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내는 입 밖으로 휘지 않은 눈과 억지로 비죽 솟은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나야말로 이 기기괴괴한 게임이라는 플레이어에 적합한 얼굴이었을 터.
검은색이 짙게 밴 ‘네’ 옆으로 색소가 증발한 ‘아니오’는 흔히 컴맹이라는 사람조차 알 수 있는 그것.
백날 천날 지문이 닳아 없어져 손가락 마디가 문드러질 때까지 찍어대도 꿈쩍 안 할 버튼.
애초에 고를 수 없게 만든 ‘아니오’는 ‘비활성화’가 된 상태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조소를 짓고 스르륵 사라진 메시지는 새로운 문구와 함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입 ㅊㅋㅊㅋ★ 지상 최대의 절망과 고통을 __께 선사합니다! 장』
***
같은 시각, 커다란 벽을 가득 메운 대형 화면으로 여자의 말간 우윳빛 피부가 새파랗게 질려가는 걸 은밀히 지켜보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야트막한 숨과 함께 희고 긴 손끝에서 투명한 주사위가 툭 하고 떨어졌다.
톡. 토독. 도르륵-.
주사위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 우리가 마주할 엔딩은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주사위만이 간직한 결말로 굴러갈 뿐. 다만, 그 길이 험난하여 멈추길 원한다면 전력을 다해, 미래로부터 앞지르시길.
2화
앞뒤 전후 사정을 따지는 대신, 직면한 위기를 위해 마음을 다잡은 지가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런 다짐이 한순간에 묵사발 될 난관에 봉착했다.
사라락.
『 콩닥콩닥 X 대저택 살인 사건의 전말♥ ▼ 』
재능 낭비로 만들어진 3D 모델링의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게임 제목이 피를 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괜찮다…… 나는 지금 미치지 않았다…….”
혼잣말과 달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상당한 공백기가 흐른 뒤였다.
『 ___님! 대저택에서 원인 모를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각 맵마다 위치한 미션 수행을 클리어하여, 어둠 속에 덮으려 했던 거대한 음모를 낱낱이 파헤쳐 주세요! 』
그걸 내가 다 하면 경찰은 손 놓고 노니?
“후우, 미치지 않았다. 나는 강하다…….”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주저앉아 되뇌었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 자신도 속아 넘어갈 주문만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파바방★
“엄마악!!!”
난데없는 폭죽에 엉덩방아를 찧고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외피를 찢고 나온 심장이 그늘진 바닥을 내달렸다. 진정할 줄 모르고 펄떡거리는 가슴께에 손을 얹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아 씨! 진짜 제 명에 못 살겠네…….”
한 박자 늦게 머리 위로 형형색색 종잇조각들이 흩날렸다. 알록달록한 색들이 휘날리는 걸 멀거니 보다가 ‘비명 지르면서 욕도 했었나?’ 멍청한 생각을 하며, 정수리에 내려앉은 종이들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고래고래 성대를 울려 성질을 내고 나니 열의를 좀먹는 기운들이 한층 희석됐단 것이었다.
빰! 빠밤!
『 긴? 여정을 떠날 ___님의 닉네임을 정해주세,엿\⊙v⊙ㅗ 』
“참…….”
‘바라는 것도 많고 가지가지 한다’라는 말은 큰 박동을 갈무리하느라 짧아진 호흡 속에 삼켰다. 울컥 치솟는 얄미움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네모난 창의 멱살을 붙잡아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나저나 닉네임을 정하라고? 이 상황에? 퍽이나 잘도 짓겠다 싶어, 콧방귀를 끼고 눈을 감자마자 수많은 글자 조합을 속으로 구상했다.
0.1초를 다투는 육상선수처럼 재빠른 태세 전환도 모자라, 작명에 대한 과한 몰입으로 저도 모르게 검지로 만든 브이 자를 턱에 갖다 댔다. 이처럼 진로를 정하고 대학을 정하는 것만큼 중요하고도 중대한 안건이 아니던가.
메시지 창 밑으로 뜬 포커 배열을 보며 신중하고도 진중한 고민은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으음……. 간결하고, 간지나고, 신박하면서 남들이 볼 땐 관종 같은…….”
1초 만에 끝난 불평과 처한 현실 따윈 말끔히 잊은 뒤, 작명에 숙명을 짊어진 양 이마를 싸매고 고뇌에 빠졌다.
“쓰읍……. 퇴폐 이황……?”
아니. 선 넘지 말자. 그동안 교과서에 있는 온갖 위인들 화장시켜 놓은 것만으로도 불경죄에 성립될 테니.
“앞으로 뒤태? 아, 너나 해. 하 씨.”
늘 이런 식이었다. 커스터마이징까지 끝내주게 완성해놓고 닉네임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 보내다가 게임도 못 해보고 접속 종료하는 날만 수십 수천 번이었다.
언제나 다른 유저 닉네임을 보고 참신하다, 기발하다를 연발하고는 정작 내건 아무거나 끼적이다가 적당히 타협을 봤었는데.
“큼큼…….”
지금이 걸맞은 타이밍이었다.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고, 괜히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본 후 수줍게 터치했다.
[여신]
위애앵- 애앵!!!!!!!!!!!!! 삐리비비빅!!!!!!!!
“악!!!”
미친 빌어먹을 시스템은 거진 중범죄자 취급해대며 철창 안을 적색경보로 물들였다. 구치소 감금 체험하는 와중, 귓속에 총알을 박아 넣는 쨍한 소음이 덤으로 딸려왔다.
생성 불가 메시지를 급하게 치우고,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한 줌의 양심에 올라타 DEL 키를 난사했다.
“아니! 열심! 여신 말고, 열심! 오타야!! 진짜야!!!”
금세 조용해진 공간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 눈치를 살살 살피는 즈음, 불쑥 텅 빈 닉네임 창에 [추천: LIAR]가 떴다가 금방 지지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 새끼 봐라……?
단전에 있던 승부욕이 들끓는 것 역시 그때였다.
[공주림] [여완님] [어도러블리] [퀸 프린세s] [도도한girl] [큐티 섹시 앙큼 앙]
[이뻐버] [귀여미] [청수니] [비너스]…….
스스로에게 부적절한 단어를 쭉 써 내려가는 동안 경보음은 다시금 처돌은 수준으로 울려댔다. 그러나 전에 겪은 경험으로 성장해, 응원가 버금가는 노동요 세례에 힘입어 더욱더 열과 성을 다해 손을 놀렸다.
차후에는 수가 먹히지 않자 적는 닉네임 족족 모자이크가 걸렸다.
“응~. 소용없어~. 내 눈에는 다 보이~ 져?”
유치한 짓을 하니 언행 수준도 따라갔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만행을 멈출 수 있었던 건, 얼마 뒤 손가락이 뻣뻣해져 움직일 수 없을 때였다.
물론 채택된 닉네임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데.”
연신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직 여정에 이응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녹초가 다 됐으니 역시나 시간 낭비는 손해였다.
“흠……. 그냥 아무거나…….”
뉴비 등장★을 치려다 말고, 그것마저 귀찮아져 손가락 관절을 얄짤없이 꺾은 뒤 한결 수월해진 손놀림으로 대강 뚱땅뚱땅 키를 눌렀다.
『 모험가 』
『 생성 오나료:B 』
“흐응…….”
김이 팍 새 버렸다. 나는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멀뚱멀뚱 게임 창을 바라봤다. 피 튀기는 결투 끝에 얻은 닉네임이란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고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때마침 들려오는 낯선 기척에 눈이 철창 밖으로 휙 돌아갔다. 급히 팔을 풀고 소리의 근원을 의심할 새 도 없이 입구에 바짝 붙어 섰다.
누군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주저하는 발걸음이 창살을 붙잡은 내 손을 풀었다 잡았다 하게끔 내적 갈등을 유발했다.
내가 반기는 게 맞는 건가?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더 최악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데.
어두운 복도에서 살랑이는 빛이 점점 거리를 좁혀올수록 발꿈치를 멈칫 멈칫 뒤로 뺐다. 이내 사람의 형체가 언뜻 보일 때쯤 걸음을 뚝 멈춘 뭔가가 가만히 서서 주시했다.
나를. 빤히.
나만을. 뚫어져라.
“흡.”
긴장감에 목을 감싼 얇은 피부가 오목하게 패었다. 경계 차 저절로 들이켜진 숨이 꽉 막혀 터지질 않았다. 새카만 두려움에 뭉개질 무렵, 사람 같았던 무언가가 시공간을 초월할 속도로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타탓. 타닥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크에에에엑!! 키에에에!”
“무, 뭐, 으아아악!!”
이토록 사이좋은 연체동물 곁에 자처해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대한 이성의 끈을 잡고 벽과 밀착되는 불상사는 없게끔 차단했다.
“저건 또 뭐야……!”
거짓이 아니라, 아무 살이나 덧댄 듯 꿰맨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붉고 거무죽죽한 피부에 비이상적으로 큰 눈이 낮게 위치한, 도저히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무언가가 철창에 매달려 두 팔을 쭉 뻗어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콧구멍 크기가 다른 콧대에 윗입술 없이 삐져나온 이는 외면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정상적인 호흡을 방해하는 악취까지 모든 게 처참하고 참혹했다. 제발 열리길 바랐던 문은 덜컹덜컹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유약하게만 보여 불안감이 증폭됐다.
“칵! 칵! 끼이에에에에엑!”
깡통을 으깨 질질 끄는 음성 역시 성별을 뭐라고 나누기엔 귀만 괴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기이했다. 무서웠다. 분명 무서웠는데, 겁나는 생김새와 별개로 눈길을 잡아끄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뭘까.
처음엔 나를 향한 살의라고만 여겼던 눈빛이 애달픈 신호 같았고,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달싹이는 큰 입가도 신경 쓰였다. 뭣보다 위험을 행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보는 사람 코가 시큰거릴 정도의 물기 어린 커다란 눈만이 자꾸 나를 불렀다.
“내가 도, 도와줄 게 있어요?”
“케에에에에에엑! 크르륵!”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어째서 고통스러운 괴음만 내는 건지 점점 안달이 났고, 괴이하게 꺾여 뼈를 드러낸 손을 붙잡아 주고 싶을 만큼 애간장이 탔다.
그러다 마음이 동해 뒤로 물렸던 몸을 천천히 움직여 손톱이 뽑혀 퍼렇게 짓무른 손가락 하나를 살짝 건드리다가, 이내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마주 댔다.
바싹 말라 푸석한 감촉과 달리 옮겨붙은 온기는 생(生) 그 자체였다.
“무슨 일이에요?”
“키이엑! 끼에에에에-!”
“들려주세요. 저한테는 괜찮아요.”
벙긋벙긋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제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인지 머리를 가로젓고 컥컥거리길 몇 번, 기어코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맞잡은 손위로 툭 떨어졌다.
“그르르…… 크, 나…… 를……. 끄으, 아프, 게…… 켁! 만든…….”
“나를, 아프게 만든.”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낭랑한 음색이 아닌 까닭에 귀를 더 가까이 기울인 찰나였다.
퍼엉!
“저런. 위험해요.”
굉음을 비집고 들어온 다정한 어투의 또 다른 목소리. 돌연 바닥으로 짓눌려 남루한 천 쪼가리만 남은 무(無)의 존재. 내 얼굴에 따뜻하고 비릿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여전히 따스한 손바닥을 응시했다. 뒤이어 턱을 타고 낙하한 핏방울들이 손금을 따라 혼을 연명했다.
“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을 벌해주세요.”
피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도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단지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한 얼굴로 미성의 톤을 올려 되물었다.
“으음? 네?”
“방금 그쪽이 냅다 죽인 사람이 한 말이요.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을 벌해주세요.”
“음, 설마. 진심 아니죠?”
“내 귀엔 똑똑히 들렸어요.”
“아니? 그거 말고. 사람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흔히 게임 내에서 볼 수 있는 법사 룩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나타난 그가 모자챙 때문에 얼굴이 반쯤 덮인 밑으로 입꼬리를 휘우듬 길게 늘렸다.
“여기 사람이 어딨어.”
일렁일렁 달래는 말투로 일축한 그가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턱을 들어 올렸다. 나와 남자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눈 맞춤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됐고, 참지 못할 충동에 휩싸인 나는 굼뜨게 한 손을 들어 올려 상대방의 입을 가렸다. 그는 내가 하는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피로 물든 손바닥을 아주 잠시 내려봤다.
그렇게 번듯한 미소가 지워지자 정신을 잃을 만큼의 오싹한 전율이 나를 강타했다.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손이 벌벌 떨렸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다. 내가 압도당했다는 걸 그도 분명 알고 있을 테니까.
앞서 경험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려움, 공포, 긴장, 절망, 무력감, 불안, 시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그의 새빨간 눈동자 속에 결집해 교교히 빛을 내고 있었다.
헷갈릴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었다.
그것은 살기였다.
3화
“누구야. 당신?”
허세 말곤 답이 없었다. 주눅 들었다는 꼴을 보이기 싫었다. 그런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뒤늦게 들린 그의 비웃음이 비수로 날아와 꽂혔다.
“당신? 그건 너무 친밀한 표현 아닌가?”
남자는 가벼운 농담을 가장한 기선제압을 시전했다.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얼뜬 시비 말이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뭐-, 열띤 반응을 원했겠지만 예상에 빗나가질 않아서.”
그가 기지개를 쭉 펴며 날연히 대꾸하는 모습에 날 선 활시위가 더욱이 팽팽해졌다.
“누구냐고 벌써 세 번 물어요.”
“시야가 좁아졌네. 나한테 겁먹어서 그런가?”
아닌 척 서로의 심리를 겨눈 공방전은 치열했다.
“……뭐?”
“음? 아,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보란 듯 손을 바쁘게 휘젓는 작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망가진 건반을 가지고 황홀한 연주를 하는 척. 표정, 행동, 말투 모든 게 교묘한 눈속임 같았다.
얜 뭐야?
나도 나만의 생각하는 동안 옆으로 비스듬하게 선 그가 힐끔, 나를 곁눈질하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전하네……. 속마음 얼굴로 내비치는 건.”
“저기요. 일부러 그래요?”
“네? 제가 뭘요?”
“안 들리게 하고 싶으면 속으로 떠들던가. 입 모양도 작게 웅얼웅얼……, 오히려 그런 게 더 잘 들어오거든요?”
“……귀도 밝고.”
저게 진짜, 또!
“이봐요.”
“여기요.”
내 말을 끊고 뭉근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거린 그가 검지를 뻗어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곳을 보니 ‘lv 6 조력자’라는 글자가 노란색으로 띄워져 있었다.
“……조력자?”
“정답~! 제가 누구냐면, 바로 조력자예요. 하하.”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그는 잔뜩 신난 얼굴로 손뼉까지 작게 치고 있었다. 해괴할 만치 깊이 없는 행동으로 거듭 신경을 긁고 눈을 사로잡았다.
조력자. 조력자라고……. 헷갈리는 타이틀 덕분에 머릿속이 크게 동요했다. 게임 속 방향을 잡아주는 NPC라는 건지, 아니면 나와 같은…….
“사람이에요?”
“네! 와아-.”
뿌듯하게 웃는 그를 뒤로하고 사념에 빠졌다. 나만 있을 줄 알았던 곳에 낯선 사람이 등장하자 의외로 동지애 같은 것보단 심연 저 아래부터 불신이 앞섰다.
단박에 정체를 이실직고했지만 안심되긴커녕, 방금 살기를 드러낸 눈과 마주해선지 갑작스러운 영역 침범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흐음……,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레벨 6의 조력자를 누가요.”
게다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또, 말하고 보니 6은 정말 하찮은 숫자가 아니던가. RPG 게임으로 치면 같은 맵에서 바쁘게 튜토리얼 진행하며, 서로 스치고 스치는 갓 태어난 뉴비 구간의 레벨이었다. 의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방금 태어난 쪼렙.
“레벨이라 불릴 것도 없는 사람보단 나은데…….”
불필요한 지적은 못 들은 척, 그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꼴을 위아래 훑으며 주의 깊게 관찰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눈깔 색은 뭐냐고, 둥근 척하는 성격은 어떻고. 삼각형을 사포로 긁는다고 동그란 원이 돼?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없, 어? 잠깐, 아까 분명.
“사람이 어디 있냐며.”
“각자 앞에 있겠죠?”
“장난 말고, 아깐 여기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랬잖아요.”
“아아. 사람 보기 힘든 데니까 에둘러 말한 거예요. 아까 그건, 음……. 진짜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막히는 것 없이 술술 언변을 펼쳤다. 말장난이란 느낌을 지워낼 순 없었지만.
“난 손도 안 대고 사람이 죽어나는 거 본 적이 없어요. 꼭, 공기로 폭발을 일으킨 거 같았는데. 그런 걸 사람이 어떻게 해요?”
“아까도 말했는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머리가 안 좋으신가 보다. 하하.”
손톱이 박혀 둥글게 말아 쥔 손안에 피가 통하지 않았다. 호쾌한 웃음소리처럼 유쾌하게 웃는 것도 아니고 빈정거리기 위해 눈만 가늘게 접어 말로만 웃는 시늉을 내고 있었다. 한낱 풋내 나는 도발에 불과하건만 왜 이리 열불 터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말을 꼭 두세 번 하게 만들던데. 님 머가리에 애도의 표시를…….”
두 손을 맞대 허리까지 숙이니 웃음기가 뚝 멎은 그의 얼굴 위에 정적이 고였다. 가면이 한 겹 벗겨진 남자를 마주하자 희열에 찬 심장박동이 빠르게 쉼 없이 뛰었다.
미친. 짜릿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만 더 화내봐!!! 울면 더 좋…….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다음으로 취할 대응을 기대했지만, 언제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냐는 듯 말끔히 씻어낸 그가 싱겁게 웃었다.
“그쪽 말대로 그런 걸 사람이 어떻게 해요. 놀라게 하기 위한 어떤 장치겠지.”
“그러기엔 타이밍이…….”
“게임이니까.”
“…….”
“음?”
어버버 거리는 내 앞에서 ‘내 말이 맞지?’의 뜻을 내포한 ‘응?’하나에 상승세 타던 전투력이 지하 300M로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게임인 걸 망각하고 있던 탓이었다.
어쩌지 싶은 마음에 턱을 긁는데, 이제는 굳어 바스러지는 피 찌꺼기가 손톱 끝에 묻어 나왔다. 저절로 호소력 짙은 어느 눈망울이 공중분해 되는 괴현상이 상기됐다.
“정말로…… 차라리 기껏해야 장치였으면 좋겠다.”
피가 말라붙어가는 볼 한쪽도 쓸어내리면서 불현듯 따가운 눈총이 느껴져 앞을 보자 나를 유심히 살피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는 기색이었다.
“……왜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뭘요?”
“가식적인 이타심.”
“…….”
말 하나하나 어찌나 독기가 가득한지 숨길 생각도 없는 적의에 되레 할 말을 잃고 벙쪄버렸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듯한 그의 시선을 빗겨내, 머리를 쓸어올리는 제스처로 황당함과 더불어 화기를 억눌렀다.
“그렇게 비치다니 유감인데요. 처음 본 사람한테 개소리 들을 만큼 막 살진 않았거든요. 제가.”
“아! 다른 뜻이 아니라, 그런 동정심은 지금 상황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니까.”
쯧, 어련히. 늑대와 양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남자를 흘깃거렸다.
지가 야누스야 뭐야?
아까부터 본심을 내놓고 불쾌한 티를 내면 그것까지 준비한 양 아주 매끄럽게 수습하던데, 무척 거슬리는 대화 방식이었다.
“그러시겠죠. 두 번 가엾게 여기다간 위선자 이름표까지 손수 달아주시겠어요.”
“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나저나 시간이 따라줄지 모르겠어요.”
“하! 예예, 바쁘시겠죠. 곧 퍼질러 앉아서 밤새 담소 나눌 만큼 남는 게 시간이라 바쁘시겠죠.”
귀를 후비며 무성의하게 대답하는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별안간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이 보면 황홀한 광경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나는 발끝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야 그럴 수 있겠지만. 뒤에 뜬 누구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는데요?”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소리소문없이 떠 있는 게임 창이 빛바랜 색을 띠며 발광하고 있었다.
『 Q. 모험가_님ㅋ (KEY)를 찾아 감옥에서 ☞탈출☜ 하세용~♪ [제한 시간 –8 min] 』
“뭐야……? 언제 떴어! 왜 멋대로 음소거 질이야! 8분? 뭐, 뭐부터 열쇠! 열쇠 어딨어!”
난데없는 시간 제약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묘사도 하기 싫은 공간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분서주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런 나를 한가로이 구경하는 남자 때문에 우리 신세를 면치 못한 동물이 된 것만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사실 2분을 허비한 거예요. 처음은 10분이었거든.”
놀라 나자빠질 정도로 고마운 소식에 이가 아득바득 갈렸다. 초연하게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린 두 손가락을 분질러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1분 1초를 다투는 숨 가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바삐 눈을 굴리며 짬을 내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7 min.
나만큼이나 급격하게 줄어드는 숫자에 절규했다. 흔히 시계 소리를 표현하는 째깍째깍 소리도 없으니 묵음에 쫓기는 처지가 배로 공포스러웠다.
-6 min.
골인 지점에 다다른 매정한 시간은 조금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았다. 얼굴을 처박고 바닥을 훑느라 머리에 피가 쏠려 시야가 흔들렸다.
미치겠네! 저장의 여부는 고사하고 뭐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잖아!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은 것도 잠시, 위치가 불분명한 열쇠를 찾느라 고개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벽과 바닥 곳곳에 눈길이 닿았는데, 이쯤 되니 선택이 불가피한 가설 하나가 거듭 등을 떠밀었다.
삐용! 삐용!
-5 min.
“하……. 알았으니까, 제발.”
빼곡히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저것들 배를 전부 까뒤집자는 결단을 내리고, 발을 막 옮기려는 차였다.
“설마 저속을 파헤치려는 건 아니죠? 아, 말만 해도 역하네요.”
“아까도 만졌어요. 시체도 못 건질 곳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낫고요.”
“시체는 내가 건지고,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단 판단은?”
역시 초라한 레벨을 달고 이름값 못하는 조력자. 닉네임 변경이 시급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주욱 끌어올린 채 결의에 찬 말투로 응수했다.
“조금도 없어.”
미간을 살포시 접어 찡그린 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에 잠긴 남자를 무시하고 제법 큰 사이즈의 거머리 등에 손을 갖다 대려는 찰나 뇌리를 스치는 의문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쟤는 어떻게 밖에 있는 거지?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곧게 피고 의문을 담은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가 가볍게 말아 쥔 손을 입에 갖다 대 목을 울렸다.
“흐음? 아쉽네, 좋은 구경 놓쳤네요. 드디어 눈치챘나 봐요.”
그의 입 앞에 있던 손이 펴지자 그토록 염원하던 열쇠가 커다란 손안에서 찰랑 깨끗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줄까요?”
그의 손짓대로 고리에 매달려 짤랑짤랑하는 열쇠에 분열된 자아끼리 대립이 시작됐다. 저 금속 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될 것이냐,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아까 멋진 척은 왜 해선. 자책이 되는 걸 보면 파블로프 쪽이 성향에 맞긴 한데.
“됐어요. 그쪽도 노력해서 얻었을 테니, 나도 해보는 데까진 해볼게요.”
동네 사람들 나대는 제 입 좀 보셔요.
허락 없이 나불대는 입에 주리를 틀고 싶었다. 대상이 대상인지라 본심과 정반대인 헛소리가 자꾸 튀어나왔다. 평소 먹을 때만 쓰던 입은 역시 동여매고 있는 게 현명했다.
아쉬움에 굳은 입매가 뻣뻣해졌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숟가락 들 힘이 없을 때 자존심이 밥 떠먹여 줄 믿음으로 살아가야겠다.
“후회할 텐데.”
흥. 아는 척은.
나는 콧방귀를 뀐 채, 거부당하고 민망함에 내뱉는 객기쯤이라 여기고 남자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띠링!
『 Unlucky 모드 발동! 서둘러염! 공간이↔줄어듭니다앙*οωσ [제한 시간 - 死 min] 』
그걸 왜 이제 알려주니?
4화
제한 시간 옆, 숫자 대신 쓰여있는 그림이 단번에 해석되자 비통했다. 죽을 사라니. 참 친절하기도 하지. 사주에 망신살로 도배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미끄러지는 길만 밟을 순 없는 법.
끼익, 크응! 그그그극.
“허읍!”
생과 사를 두고 터득한 축지법으로 벽과 거리를 벌리고 섰다. 손으로 만진다 했지 온몸으로 부대끼고 싶단 적은 없었다. 저 멀리 차츰 다가오는 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종족과 다리와 털만 있는 풍성한 종족에 21세기 지성인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남자를 향해 애원했다.
“열쇠! 빨리! 빨리빨리! 아악! 온다!”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흠칫한 남자가 한 발 짝 발을 뒤로 뺐다.
“……입에 거품.”
그러지 마. 멀어지지 마. 닦으면 되잖아.
“빨리! 오잖아! 나한테 오잖아!”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날 보던 남자는 침묵을 유지하며 쉬이 열쇠를 넘겨주지 않았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살기로 무장했기에 되도록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과연 인생이란 한 치 앞도 예상 못 하는 거라 했던가.
“그럼 아까 ‘줄까아?’ 하고 물은 건 뭔데!”
“그런 적 없어. 그리고 그냥은 안돼.”
“여기서 협상을 시도하는 건 아니잖아! 이거 안 보여?!”
나야말로 못 배워먹은 패악질에 버금가는 행패였지만 별 수 없었다. 자그마치 괴해충들이 혼비백산하여 내 발을 피해 새카맣게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나도 노력해서 얻은 거라.”
그가 또 한 번 열쇠를 흔들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주름을 와락 일그러트린 나와, 남자의 팔랑팔랑 부드러운 눈웃음이 참으로 상반되고 눈물 나게 고와서 어금니를 짓씹고 물었다.
“그래. 그럼 뭘 원하는데.”
“글쎄? 이를 테면 파티라든가.”
“파티?”
“그래, 파티.”
남자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지그시 눈을 맞췄다.
파티. 게임 내 다른 유저들과 뜻이 같은 무리를 이루고 보상을 취하는 개이득 시스템. 뼛속까지 솔플러인 사람에겐 흠이지만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공동체.
-3 min.
뭐라도 제안하면 일단 전부 수렴하자는 심산이었지만, 막상 동맹을 맺자고 권고하니 여간 떨떠름한 게 아니었다.
챙이 넓어 그늘진 눈 위로 번쩍이는 저 눈. 마치 루비와 황동을 녹여 만든 듯한 진한 잔혹함의 상형. 살해쯤이야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손쉽게 저지르고 본뜬 시체를 박제해 장식품 대용으로 비치할 것 같은 괴랄한 본질이 다량 함유된 저 눈이 문제였다.
“어…… 그, 그러니까…….”
나는 여태 갈피를 못 찾고 입만 뗐다 붙였다 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유심히 보다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얘기했다.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그거 알아요?”
“……뭘요?”
“귀신들이 시계 소리를 참 잘 따라 한대요.”
“시계 소리요?”
“네. 시계 소리.”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하던 그때, 고개를 홱 쳐들고 남자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연했다. 어쩐지 긴박한 상황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똥줄 타게 만들더니. 내 머릿속이 아니라 진짜 들리는 거였구나.
누군지 몰라도 설계 한번 기가 막혔다. 물렁했던 정신에 매다 꽂힌 초침 사운드는 좀처럼 사유할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남자의 하등 쓸모없는 정보로 괜히 넋을 일깨워준 덕분에 속도를 가해 결정할 수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런 건 비밀로 간직해 주고, 파티는…… 좋아요. 네, 해요!”
대충 이번 위기만 넘기고 바로 손절 각잰다. 속 시커먼 놈 같으니라고.
“확실히 하죠. 볼일 다 봤다고 중간에 깨고 유야무야, 그딴 거 없으니까.”
홀리 쉣. 독심술?
얕은수를 손쉽게 간파당하자 식은땀이 쓴웃음을 진 얼굴 위로 폭포수마냥 흘러내렸다. 심지어 얼어붙은 남자의 눈 코 입을 보니, 내 장례식장에서 파티를 열 것만 같아 연신 쿨럭대며 헛기침으로 속내를 무마시켰다.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 같이 다니겠어요? 피차 못 믿는 건 똑같은 거 같은데.”
“못 믿는다는 증거는?”
날 보면서 내비친 살기다. 이 새끼야.
“그럼 열쇠만 잠깐 빌려줘요. 나가면 도로 줄 테니까,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각자 갈 길 가고.”
“양심 없어요?”
응. 조금 그런 편.
크그그긍! 끼릭, 끼이익.
-2 min.
팔을 조금만 더 길게 뻗으면 벽이 닿을 테고, 밀려드는 바닥 모서리에 바글거리는 벌레가 큰 포복 두 걸음이면 나를 삼키고도 충분한 거리가 됐다. 이 이상의 시간 지체는 곧 자멸이었다.
“그럼 뭐 어떡하자고요!”
“내게 귀속되어 영멸할때까지.”
“……?”
느닷없는 느끼한 소리는 둘째치고, 그의 몸 주변에서 빨간 기체가 너울댐에 의아해하던 와중 남자가 덧붙였다.
“그때까지 파티는 지속되는 거예요.”
그 얼굴. 아까 나를 짜릿하게 만들었던 선득한 그 얼굴이었다. 분명 같은데, 나는 왜 숨 한번 내쉬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걸까.
아마 그에 대한 답은, 나와 동일시한 몸 곳곳의 세포들이 전이시킨 짜릿함에는 환호를, 지금의 자극에는 피부를 뚫고 나오려는 위험 신호를 닭살로 준 이유일 것이다.
띠, 띠링!
알림음은 소리를 덧대며 중복된 두 개의 창을 띄웠다.
『 지금부터 60초 카운트를 시작합니다. [제한 시간 -1min] 』
『 [조력자]님과 파티를 수락하시겠습니까? [-59sec] 』
조하 / 실허
문구를 읽어 내려갈 때 역시,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었다. 뺨에 드리워지는 어둡고 질척이는 기운과 발에 채는 가려운 건조함에 30초를 들어선 절체절명의 순간 손가락을 급히 들어 올렸다.
엄지손가락만한 알맹이 두어 개가 기어코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오자 졸도하기 직전 두 다리를 마구 털며 간청했다.
“아아아악! 할게! 제발 살려줘!”
눈이 다 감기기 전, 열린 문 틈새로 난입한 희고 긴 손이 내 허리를 둘러매고 강한 힘으로 끌어냈다.
그그그그, 쿵!
파바바바방!★
『 콩그레chu-♥레이숀 ㅊㅋㅊㅋ합니다! Mission Clear! :> 』
“허억, 허억…….”
찬 바닥에 널브러져 숨 가쁘게 심호흡했다. 거친 숨소리가 입안을 깔깔하게 만들어 괴수 같은 신음이 마른 성대를 긁고 흩어졌다.
“어흐…….”
다리를 쭉 뻗고, 머리를 뒤로 젖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미션 클리어라는 고딕체의 영어가 둥둥 떠 있었지만 단 한 스푼의 기쁨과 반가움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는 게임 창 뒤로 약간 작은 사이즈 때문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창이 공허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 1. lv6 조력자
2. lv1 모험가 』
우여곡절 성사된 파티원의 목록이었다. 두 닉네임 옆으로 길게 그어진 빨간 게이지를 보아하니, 아마 체력바를 나타낸 듯 보였다. 풀로 채워진 조력자 밑에 반절이 꺾인 내 상태바는 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돼 결국 바닥에 머리를 뉘었다.
“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할 일이 많아요. 거기서 살 거예요?”
뾰족한 말투에 비해 천사의 숨결 같은 음성에 홀린 듯, 줄곧 갇혀있던 감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간이 압축됐기에 그 안에 살던 생명체들은 일체 짜부가 되어 혼합된 점성을 뚝 뚝 흘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웬 걸.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슬며시 상체를 일으켰다. 남이 봤다면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뱅뱅 돌릴 정도로 미쳐 날뛰었던 쇠창살 그 너머엔, 모난 곳 없이 반드러진 나무 벽이 곧게 깔려있었다. 안 어울리게 묻혀있는 철문이 아니었다면 입구도 찾지 못했을 터였다.
“벽이…… 됐네?”
“이제 필요 없는 오브젝트잖아요.”
혼잣말치고 컸지만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어서 조금 맹한 얼굴로 남자를 마주했다. 머리 위에 떠 있던 닉네임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그렇네요. 게임이니까…… 여기도 그렇네.”
조력자가 서 있던 동굴 입구마저 나무 장판으로 곧게 깔려있었다. 새로운 탈바꿈이었지만, 남자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는 걸로 주제를 간단히 종결했다.
“아, 살려줘서 고마워요.”
병든 닭처럼 매가리 없이 건넨 인사치레에 조력자가 은근한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뒤늦게 가식적인 이타심이라며 눈 돌아가게 만든 언행이 떠올라 허둥지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심이에요! 조력자님 아니었으면 저 문처럼 나무 인간이 될 뻔했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히히…….”
억지로 웃는 통에 뺨 두 쪽과 눈 밑이 후들후들거렸다.
“같이 다닐 땐 웃지 않도록 해요.”
콱씨. 주둥이 조사벌라.
그의 말 한마디에 중력을 이기지 못한 볼이 밑으로 쑥 꺼졌고, 늘어난 입꼬리가 옹졸하게 모여들었다.
아까 뭐 영원히 같이 다니자고 안 했나? 결국 평생 웃지 말란 소리잖아?
웃는 얼굴은 건드리지 말랬거늘. 저 눈알 찌를 것 같은 모자 벗겨내고 정수리에 손날을 확 박아버릴까 보다. 근데 저 모자 보면 볼수록 과하다 과해. 지가 콘헤드야 뭐야.
도도히 돌아선 얌체 같은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힘차게 들어 올린 찰나였다.
“아, 그리고.”
“흐브!”
너무 놀란 나머지 입술을 붙이고 소리 내 버렸다. 거두지 못한 중지와 볼에 바람이 찼다가 빠지는 걸 번갈아 보던 조력자는 이내 눈매를 찌푸리곤 독백하며 앞서 걸어갔다.
“나무 인간이 아니라, 그 벽에 짓눌려서 뼈도 못 추렸을 거예요. 그쪽 말대로.”
어쩐지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퍼뜩 다리를 움직여 조력자를 쫓았다.
사락.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10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남자를 따르는 내 뒤로 우롱하듯 음소거로 떠오른 메시지 창은 기다란 복도를 선단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공중에서 음흉하게 서 있었다.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5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성큼성큼 전진하는 조력자에게 하릴없이 시선이 뺏겨 경계를 허물고 주위를 살피지 않은 불찰.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1초 뒤 자동 수령됩니다.] 』
과실과 유착이 만나 생겨난 죄악. 죄인이 저지른 처음이자 마지막 오류는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온다.
『 공식적인 첫 여정을 떠난 초보 모험가_님을 위한 가이드! [수령 완료.] 』
이미 어둠에 삼켜진 두 사람 뒤로, 길이 나있던 바닥 조각조각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곧이어 눈이 멀 정도의 하얀 빛이 크게 발광하더니, 점차 사그라들며 구절을 품은 네모난 도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 가엾은 모험가_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TIP! 곳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도망은 공멸의 지름길. 상대보다 먼저 칼을 빼드십시오. ▼ 』
『 언제나 모험가_님의 안녕을 위하여. 』
쾅!
5화
“히익!”
별안간 낙뢰처럼 내리꽂히는 커다란 굉음에 소스라치며 뒤돌았다. 목을 비튼 보람도 없게 칠흑마저 덮어버린 어둠만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다.
“어후, 놀래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괜히 남자를 보는데, 역시 고답적인 제자답게 미동도 없었다. 마치 돌상 같은 자태에 멋쩍음이 두 배가 됐다.
“큼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내게 조력자의 눈길이 언뜻 닿았지만 모른 척, 분위기 환기도 시킬 겸 혀끝에서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그 옷들은 뭐예요?”
그러자 본인의 기다란 옷자락을 내려보고 낮게 유지한 시선이 내 쪽에도 스쳤다. 그가 귓불을 바투 만지고는 느른히 대꾸했다.
“여기서 주웠어요.”
그니까 왜 그런걸.
“아, 네. 주워 입으셨구나.”
별생각 없이 그가 한 말을 다시 복기했을 뿐인데,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순간 뜨끔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말뜻을 의뭉스레 표하는 추임새에 메마른 웃음을 어색하게 지어 보였다.
***
“…….”
“…….”
어두침침한 주변 탓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 삐거덕거리는 원목 데크타일을 발맘발맘 내딛는 나와 조력자 사이에 괴괴함이 흘렀다.
제기랄. 수, 숨 막혀.
어딜 가는 건지, 어디까지 온 건지, 얼마큼 더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에 답답하고 불편함에 압사할 것 같았다.
산소 호흡기가 절실할 무렵, 입에 거미줄을 치고 나아가는 조력자를 흘겨봤다. 이분은 아예 승려의 길을 걷기로 한 듯, 침묵 수행을 성실히 정진하기에 엄숙한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복장 터져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
공상이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해 과대망상이 될 지경에 이르자 조력자가 모살을 위한 큰 그림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당장 고독을 씹을 때가 아니라고 사료돼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어- 어, 저는 아직도 좀 얼떨떨한데…… 빨리 적응하셨나 봐요.”
조만간 이동 생활하며 수렵과 채취를 하고, 벽화로 소통하기 전에 성대의 근육을 쥐어짰다. 벌써부터 말 한 토막 하는데, 목이 걸걸한 것 보면 현명한 선택이라 방증했다.
“왜요?”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사실 저는 아직도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데…….”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지금이 현실이란 건 틀림없으니까.”
이어가던 말을 한템포 쉰 조력자가 나를 보곤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겠어요.”
“아, 네. 노력 중이에요.”
“그리고 저보단 낫잖아요. 혼자보다 둘인데, 의지도 되고 심적으로도 훨씬 편할 거고. 그렇죠?”
예상보다 성의 있는 대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꽤 당당한 후자를 듣고 나니 삐딱한 대거리가 내 입꼬리를 추욱 떨궜다.
두 번 편했다간 아예 머리 밀고 산길에 동행하게 생겼는데요. 하여간 콤비가 되기엔 내게 너무 먼 그대였다.
“어, 쏘 굿. 음, 그런데요.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글쎄요.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 같은 돌부처가 또? 절대 사절.
“으, 아니요…….”
“왜요?”
“저는 무교라.”
“…….”
싱거운 교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 빈자리를 대신해 적막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단절된 대화는 정신건강에 무척 해로웠으므로 재차 주제를 던졌다.
“조력자님은 어쩌다 이곳에 왔어요?”
“모르겠어요. 눈 떠보니 게임 속이던데요.”
“어, 저랑 같네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기 전에는 뭐하고 계셨어요?”
“아! 저는, 저는…… 그니까 어…….”
어라?
결코 어려운 질문이 아니건만 당황스러웠다.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자기 전에 뭘 했지? 기억해내려 할수록 뿌연 안갯속을 들여다보는 듯 갑갑할 뿐이었다.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금방 답을 하지 못하자 남자의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던 발걸음도 그 자리에 못 박혀선 오직 답변만을 토색했다.
“눈을…… 감았어요.”
“……네?”
“눈 감았는데요? 아니다. 불을 껐나?”
손바닥에 땀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입을 작게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조력자는 몹시 황당해 보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휘발된 메모리를 그대로 발설할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본능이라 답하겠다.
“그, 그쪽은요? 조력자님은 뭐 하셨어요?”
“아, 네. 뭐…… 저도 비슷하겠죠.”
“흐흥, 하하하하!”
“아, 하하하하.”
미친. 하나도 안 웃겨.
벌레 소굴에서 눈을 떴으니, 너무 놀라 기억을 잠시 잃은 거라고 자위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조력자가 마주 보며 웃는 건 예상 밖에 일이었다.
아깐 웃지 말라며. 이거 완전 바보들의 행진이잖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원했던 건 맞지만, 워낙 서로 켕기는 게 많으니 억지웃음 멜로디가 귀곡성 같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하하. 음, 그래요. 맞다! 열쇠는 어떻게 얻었어요?”
“노력해서요.”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남자를 지나쳐 걸었다. 어쩌면 대화를 지속하지 않는 게 신상에 더 이로울 거란 판단이었다.
***
그 어떤 시시콜콜한 잡담도 없이 벽에 손끝을 스치며 좀 더 걸었을 때였다.
띠링!
『 Q. 대저택을 환하게 밝힐 퓨즈를 찾아 연결하세요. (퓨즈 0/2) 』
아무리 어두워도 시간이 흘러 익숙해진다면 어느 정도 형상은 가늠이 됐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눈에 걸리는 게 없어 제자리걸음을 의심하던 차 퀘스트가 떴다. 못해도 거진 팔천 보는 걸었을 거라 자부했다.
“아, 드디어.”
내가 뱉은 한숨 같은 탄식에 거리를 벌려 걷던 조력자가 다가왔다.
“왜요?”
“퓨즈를 찾으래요. 그쪽도 받았어요?”
“난 이미 했어요.”
양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였던 몸을 일으켜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보자 조력자는 그때처럼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파란색의 LV6이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를 도왔다.
“아……. 그럼 지금 잘 보여요?”
“네.”
“잠깐 기다려봐요.”
나는 조력자와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그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어림조차 못할 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신나게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게 몇 개일까요~!”
“한 개네요. 그것도 손가락 중에 제일 긴.”
군더더기 없는 정답이었다. 나는 팔을 주무르며 방전된 기계처럼 터덜터덜 조력자 앞에 섰다. 어쩐지. 적확한 나침반처럼 거침없이 걸어가더라니.
“보이는 줄 몰랐네요. 물어보질 않아서 언질도 안 주신 거겠죠.”
“네.”
냉정과 열정 사이 딱 가운데에 위치한 감정선이 중립을 지켰다. 따질 것도 없이 화낼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도움을 받아 퀘스트를 깼고 저자는 혼자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레벨 6을 만들었을 테니. 오히려 초라하다고 비하한 내가 더 나쁜 인간이었다.
“네……. 그럼 여기 있을래요? 저는 퓨즈 찾으러 다녀올게요.”
“네.”
저런 X놈의 새끼.
인간 고쳐 쓰는 게 아니란 절대적인 진리. 어디 안 가고는 못 배길 본성에 3초 전 했던 자기 반성이 무용지물 되어 버렸다.
선의로 건넨 빈말을 덥석 물은 조력자는 보란 듯 바닥에 퍼질러 앉아 후련한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그 행태를 보며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냐고, 저 치렁치렁한 옷자락으로 목을 조르고 싶었다.
“음. 저랑 파티는 왜 하신 걸까요?”
“아아. 괜찮아요. 아직 민폐라고 여긴 적은 없어요.”
나는 색다른 해석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코 옆을 긁었다.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건지, 저 양반 이해력이 딸리는 건지 분간이 안 돼서였다.
“아니. 진짜 민폐로 전락하면 손해가 막중하실 텐데 왜 저랑 다녀요, 굳이?”
“그거야 당연히 재-.”
“재?”
“미-.”
연이어 속을 긁는 저 아구창 안에 두 주먹을 쑤셔 넣고 떡방아를 찧는 충동이 일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고등동물로 남을 수 있었다.
“재밌잖아요. 구경거리도 많을 거 같고. 이번엔 안 놓쳐야지.”
확인 사살까지 해주는 자비로움에 온기가 치솟다 못해 팔팔 끓었다.
뭐? 재미?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재미를 찾다니.
뱃속에서부터 영양분 대신 낙천적인 사고를 주입했나. 감히 흉내도 못 낼 여유였다. 혹은 혼신의 깐족이라든가.
“둘 중 하나라도 재밌으니 다행이네요. 그럼 앞도 잘 안 보이는 제가 다녀올 동안 쉬고 계실 거죠?”
“네.”
저런 X놈의 종자 새끼를 봤나.
“으흠, 그 재밌다던 파티원 하나를 잃으셔도?”
“…….”
먹혔다.
말 끝날 때마다 ‘네, 네’ 거리던 네무새는 돌연 말을 아꼈다. 이어 나를 보기 위해 홉뜬 눈동자가 심상치 않은 안광을 내뿜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죽음의 신 하데스도 벌벌 떨 저 눈동자가 심장을 멈추게 하는 원흉이었다.
“짠, 농담이었습니다. 다녀올게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몸을 움직였다. 말장난하다가 세상을 하직하고 싶진 않았다. 쌀쌀한 영안실에 누워 고인이 된 사인이 농담으로 인한 상대의 촉발성 살인이라면, 그 얼마나 가치 없는 죽음이란 말인가.
“이래서.”
몸을 돌리고 선 내 뒤로 조력자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뚝 멎은 다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금세 곁에 다가온 그가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금속 물질을 빼 들었다.
넌지시 귀를 후벼파는 잠깐의 따가운 들림만으로도, 구태여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알아차리는 건 난제가 아니었다.
칼. 보통 식칼의 기준점이 되는 길이에 미치지 않는 걸로 보아, 어둠 속에서조차 반짝이는 그것은.
아무리 짧다 한들, 사람의 급소 따위는 손쉽게 꿰뚫을 단도임이 틀림없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른침이 자꾸만 넘어갔고, 손발이 바들바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기복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지만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선 무력할 뿐이었다.
“무, 뭐예요? 갑자기 칼은 왜……?”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요?”
“그럼요. 당연하잖아요.”
어떻게 잊어. 세기의 메스꺼운 대사였는데.
“뭔데요?”
“귓속, 귀, 귀속되어 영멸할 때까지.”
“귀속은 이미 됐고, 영멸할 때까지. 그전에 결렬되는 건 용납 못해요. 자의든 타의든 죽지 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 부지해서 약속 지켜요.”
낮고 음산한 목소리. 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목소리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알았어요. 그런 얘길 왜 흉기를 들이밀고…….”
그래서 살라는 거야. 당장 죽으라는 거야. 혼미할 정도로 휘두르는 그의 결기에 명맥이 위태로웠다.
“구두계약은 꼭 문제를 만드니까.”
“구두계약 아닌데…… 우리 머리 위에 표시가 딱.”
샥!
“아악! 뭐, 뭐 하는, 지금…….”
난데없는 조력자의 돌발행동에 입을 틀어막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한줄기의 어슴푸레함도 없었다면 이런 살 떨리는 짓을 바로 앞에서 목도하는 일은 없을 텐데, 가늘게 풍기는 피비린내에 아뜩했다.
주륵, 뚝. 뚝. 뚝.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칼날을 손으로 덮은 상태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손잡이를 잡아 빼냈단 말이다.
6화
“진짜 미쳤어요? 뭐 하는 건데!”
화가 났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어깃장을 놓는 거라 생각했다. 서슴없이 자신의 살을 가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삼신할머니가 와도 점지 못할 능력 밖의 수준이었다.
“공증 준비.”
“뭐?”
“서류가 남아야겠다고.”
“너 진짜 또라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니?”
“어. 그래야 풀려. 그러니까 장단 좀 맞춰줘.”
조력자는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폭 넓은 소매 안으로 들어간 혈액이 벌겋게 스며든 옷감을 관통해 팔꿈치에서 뚝뚝 떨어졌다.
“장단? 장난해? 너는 장단을 자해로 맞춰?”
“쯧. 자해는 무슨.”
그는 눈 한쪽을 찡그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여유가 물씬 풍기는 몸태에 짜증이 치솟았다. 상처를 낸 건 조력자였다. 그런데 과다출혈로 죽을까 봐 마음을 졸이는 건 나라는 게 전부 불쾌하고 언짢았다.
“설마 울어?”
“신경 꺼! 원래 빡치면 눈물 나니까!”
“왜?
“하 씨……. 뭐, 왜? 왜?! 진짜 열받게…… 으흐엉…….”
허물어진 물둑에 들이붓는 눈물샘을 손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말 안 하고 손 베서?”
미친놈인가.
“말하고 베는 건 으흡, 정상인 줄 알아?”
“그럼 뭐 때문에 우는데요.”
눈물의 발단은 조력자 탓이 분명했지만, 그렇게 말하자니 한 가지로 함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에 부합한 대답을 못 찾고 함구한 채 그저 울음만 삼켰다.
“왜 우냐니까.”
“하이씨……. 더럽게 집요해서 운다! 됐냐……?!”
“아니잖아요. 무서워서 그래요? 그럼 빨리 퀘스트하고 불을 켜요.”
“으흑……. 그냥 입 여매고 가만히 있으라고…….”
서러웠다.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게임 속이라는 사실이 서러웠고, 작은 소리에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게 서러웠고, 현재가 내일인지 오늘인지 시간을 알 수 없어서 서러웠고.
자기 전 내가 뭘 했는지 기억 나지 않는 게 서러웠고, 고작 몇 시간의 공백만이 아닌, 나에 대한 촘촘한 정보가 부분부분 뿌리째 뽑혀 나가서, 마음을 몇 번이고 고쳐먹는데도 자꾸만 무너져서, 그래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또, 언제 변할지 모를 그가 한층 누그러든 말투로 핀트 나간 엉뚱한 대답하는 게 안심돼서, 무작정 모든 게 서러웠다.
쭈그려 앉아 고개 숙이고 우는 내 머리 위로 긴 한숨이 복잡한 심경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조력자 또한 나와 시선을 맞춰 무릎을 굽혔다.
“어차피 퓨즈는 나한테 더 이상 안 보여요. 퀘스트가 끝났으니까. 그 대신 이걸 줄게요.”
머리만 약간 들어 로브 속을 뒤적거리는 남자를 훔쳐봤다. 겉에 둘러진 망토 때문에 보이지 않는 물건의 정체가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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